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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훈 선배 앞에서 덩크슛! 마스크의 힘이었습니다”

농구인터뷰

by 멍뭉큐라덕션 2023. 2. 14.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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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장훈 선배 앞에서 덩크슛! 마스크의 힘이었습니다

기사입력 2023.02.14. 오전 09:58 최종수정 2023.02.14. 오전 09:58

[김종수의 농구人터뷰(71)] '한국의 짐 캐리' 김성철

‘역대 가장 덩크슛을 잘했던 슈터는?’ 국내 기준 3점슛을 주무기로 하는 이른바 슈터는 덩크슛과는 살짝 거리가 있어보이는게 사실이다. 3점슛이 가장 먼거리에서 공격하는 수단이라면 반대로 덩크슛은 림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득점이 이뤄진다. 필자의 주관적 견해로는 ‘돌고래 슈터’ 문경은과 ‘짐 캐리’ 김성철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문경은은 덩크슛을 많이했던 슈터는 아니지만 이른바 임팩트가 강했다. 덩크슛을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시절 연세대 소속이던 문경은은 이따금씩 선보이는 덩크슛으로 분위기를 바꾸고는 했는데 특히 리버스 백덩크는 그의 전매특허였다. 1994년 1월 농구대잔치 고려대전에서 터진 백덩크는 경기장을 찾았던 팬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각종 스포츠신문 1면을 문경은의 백덩크 사진이 장식했을 정도다.

이후 프로농구가 시작되면서 적극적으로 덩크슛을 시도하는 선수들이 늘어갔다. 대표적인 선두 주자가 당시 SBS(현 KGC)의 젊은피 듀오 윤영필, 김성철이었다. 경기내내 뜨거운 에너지 레벨을 자랑했던 둘은 틈만나면 적극적으로 덩크슛을 시도하며 팬들에게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특히 김성철(46‧195cm)은 슈터이면서도 덩크슛 등 화려한 플레이를 연일 선보이며 SBS 쇼타임 농구의 간판스타로 떠올랐다. 1라운드 4순위로 지명됐지만 조상현, 조우현 등 쟁쟁한 경쟁자들을 누르고 신인왕을 수상하기도 했다.

정규리그 507경기에서 통산 5177득점, 1355리바운드, 1076어시스트, 370스틸, 108블록슛을 기록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프로에서 묵직한 흔적을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팬들 사이에서는 ‘더 큰 스타가 될 수도 있었다’는 아쉬움의 목소리도 있다. 충분히 잘했지만 신인시절 등 초창기에 보여준 재능의 기대치가 워낙 높았던 이유가 크다. 화려한 시절 못지않게 굴곡과 시련도 있었지만 그것을 통해 더 성장해가고 있다고 밝히는 한국판 짐 캐리의 농구인생을 리와인드해보았다.

 

“현역 시절 제가 농구했던 부분은 그저 참고만 해야겠더라고요”

Q.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아시다시피 이상범 감독님 따라서 DB 코칭스탭에서 물러난지 얼마되지 않았잖아요. 지금은 모처럼 여유로운 겨울을 보내고 있습니다. 1월달에 이렇게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있는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 대부분 시즌 중에는 항상 바빴고 5~6월달부터나 조금 한가해지고 그랬거든요. 혼자만의 시간도 좀 생기고 하다보니 간만에 제 자신도 돌아보고 생각도 정리해보고 그러고 있습니다.

Q.어린 아들이 한명있는 것 같던데 혹시 농구를 하고 있나요?

아, 카카오톡 프로필을 보셨군요? 그게 업데이트를 안해서 아주 예전거에요. 거기있는 사진은 모두 어릴 때 사진이고요. 지금은 부쩍 컸어요. 저만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하지만 농구는 하지않고있어요. 취미삼아 조금씩은 하고있지만 선수부 농구는 하지않고 있다고 말씀드리는게 정확할 듯 싶습니다. 일단 본인이 큰 관심이 없어요. 억지로는 시킬 수 없잖아요. 제주도에서 지내다가 현재는 기숙사가 있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고등학교에 가있는 상태입니다. 이것저것 다양한 환경과 문화를 접해보면서 경험치를 좀 늘렸으면 싶어요. 저하고 다르게 녀석은 지금 제법 통통하답니다.(웃음)

Q.최근 사진을 봐도 예전과 별 차이가 없어보이던데 살이 안찌는 체질인가봐요?

제가 봐도 그런 것 같아요. 평소에 소모가 많은지 아님 기초 대사량이 많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살이 잘 안붙는 편이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막 먹고 그러면 살이 찌기는 해요. 은퇴하고 15kg정도 늘어나서 100kg를 넘겨본적이 있는데 아우…, 안되겠더라고요. 거울 앞에서면 제 모습인가 싶기도하고 몸도 무겁고 장점보다는 단점만 느껴지던데요. 옷입을 때도 옷테가 안나고요. 주변에서는 얼굴이 좋아졌다는 말도 해주던데 제 입장에서는 얼굴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몸이 너무 마음에 안들었습니다.

Q.농구는 꾸준히 보고 계시죠?

그럼요. 시즌 중간에 나왔기 때문에 지금 시즌이 한창이잖아요. 뭐 특별히 챙겨보려고 노력하지않아도 계속 농구 쪽에 있었던지라 자연스럽게 눈과 귀가 가는거죠. 쉬고있어도 돌아가는 상황과 흐름을 알아야하지 않겠어요. 농구 쪽에 있던 사람들은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요. 매일같이 농구만 접했는데 그것만한 관심사가 어디있겠습니까. 막 팀을 떠났을 때만 해도 여러 가지 마음이 교차했는데 지금은 많이 정리가 되어서 객관적으로 상황도 보게되고 그러더라고요.

Q.DB에서의 코치생활 동안 많은 것을 느끼시고 생각하셨을 듯 싶어요.

그렇죠. 비단 저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코칭스탭으로 계신 분들은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많은 부분에서 생각, 가치관 이런 것이 바뀌기도 해요. 그 이전에도 그랬지만 DB에서 이상범 감독님을 모시고 있는 동안 팀이 부침이 심했잖아요. 어떨 때는 성적이 정말 잘나왔다가 또 어떤시즌에는 뭘해도 잘 안풀리고…, 마음 고생이나 여러 가지 부분에서 감독님이 제일 힘드셨겠지만 저도 옆에서 많이 배우고 느끼고 그랬습니다. 일단 저의 선수생활을 기준으로 선수들을 평가하고 가르치려들면 안되겠더라고요. 저는 뭐 스타까지는 아니었지만 화려한 현역 시절을 보냈던 분들은 본인이 훈련하고 플레이했던 것을 중심으로 가르치려고하는 경향도 더러있어요. 하지만 사람마다 재능과 적성이 다르고 또 요즘은 농구트랜드나 시대환경 등 여러 가지로 많이 바뀌었잖아요. 나에 맞추려하지말고 내가 맞춰가면서 가려는 노력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현역시절 제가 농구했던 부분은 그저 참고만해야겠더라고요.

“고등학교 때까지는 센터였습니다”

Q.농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어릴 때부터 키가 컸어요. 그러다보니 초등학교때 육상 정확히 말하면 멀리뛰기를 통해 운동을 접하게 됐죠. 키크고 팔다리 길고 마른 체형이다 보니 잘뛰게 생겼었나봐요. 그러다가 농구부 선생님 눈에 띄어서 농구로 발을 들이게 됐죠. 당시 농구가 인기가 상당한 편이었어요. 이충희, 고 김현준 선배님 등 스타들의 인기도 상당했고요. 선생님께서 아무래도 육상보다는 농구가 전망이 좋다고 부모님을 설득하신 부분이 크죠.

Q.농구를 시작하면서 가장 크게 놀랐던 것은 무엇일까요?

신장이죠. 저는 제가 정말 많이 큰줄 알았어요. 실제로 저희 학교에서는 장신급으로 속했고요. 초등학교 졸업반때 168cm정도 되었으니까요. 그러다가 경기도 대회를 우승하고 전국대회를 나갔는데 서울이나 광역시 쪽 선수들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세상에 170cm중후반 가량 되는 선수들이 꽤 있더라고요. 세상에 저렇게 큰 선수들이 있구나싶었어요. 정말 우물안 개구리였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경기도가 지금처럼 농구 강호가 아니었어요. 서울이야 중심이니까 당연하고 부산 등 이런 광역시쪽에 강팀이 꽤 있었어요. 그러다보니 실력은 둘째치고 하드웨어가 엄청난 선수들이 해당 학교로 모여들게 됐죠.

Q.당시에도 작은키는 아니었을텐데 빅맨이 아닌 슈터로 성장했어요.

아뇨. 고등학교 때까지는 계속 센터를 했어요.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큰 선수가 슈터를 하겠어요. 더군다나 각 학교 별로 장신자가 많지도 않았고요. 포워드로 포지션을 변경한 것은 경희대에 입학하고나서부터입니다. 고등학교를 삼일상고를 나왔는데 당시 은사님이 이현중 아버님으로 유명한 이윤환 감독님이셨어요. 지금이야 삼일상고가 상당한 강팀인데 당시에는 그다지 강한 전력이 아니었어요. 다른 스포츠도 마찬가지겠지만 농구에서 스카우트는 무엇보다 중요하잖아요. 부익부빈익빈이라고 성적이 잘나오는 학교로 선수들이 몰리는 성향이 있죠. 앞서 언급한데로 경기도 쪽 학교는 농구 유망주들이 선호하는 곳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경기도에서 잘하던 선수들도 서울 쪽으로 갔으니까요.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저와 동기 강혁은 선생님 밑에서 열심히 농구를 배워나갔던 기억이 납니다.

Q.경희대에 들어가서 비로소 이름이 알려졌던 듯 싶어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죠. 일단 제가 전국구로 명성을 떨칠 만큼의 선수는 아니었던 부분도 컸겠죠. 더불어 전국대회를 많이 나가지못한 부분도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지방학교들은 재정 상태가 좋지 못한 곳이 많았습니다. 당시는 대부분의 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는데 지방팀 입장에서는 적지않은 인원이 움직이면서 먹고 자고 하는 부분을 무시할 수 없었죠, 교통비, 숙박비 등 적지않은 돈이 들어가잖아요. 저희 학교도 마찬가지였던지라 대회 참가 자체가 많지않았어요. 성적을 낼만한 대회에 골라나갈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고 그것마저도 성적이 잘나면 4강 정도 운좋으면 결승행 정도의 전력이었습니다. 전국 랭킹 1위를 다툴 정도로 압도적으로 잘하지 않는 이상 이름을 알리기에는 이래저래 어려운 환경이었죠.

Q.그래도 고등학교 시절 무명까지는 아니었던거죠?

그렇죠. 고2때부터 그래도 이름이 조금씩은 알려지기는 했습니다. 이곳저곳에서 스카웃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으니까요. 하지만 동포지션에서 저보다 명성에서 앞서는 선배들이 워낙 많았던지라 스카웃의 집중 표적이 되고 그러지는 못했어요. 당시 제가 4, 5번을 오가는 빅맨 포지션이었는데 이쪽에서 강력한 선수들이 꽤됐죠. 서장훈, 박훈근, 전희철, 박준영, 현주엽, 윤영필, 변청운, 김택훈 등 차고넘쳤죠. 정통적인 의미에서의 클래식한 빅맨도 있었지만 저처럼 내외곽을 오가면서 플레이하는 지금으로 말하면 3.5~4.5번 플레이어들이 계속 배출됐습니다. 저도 빅맨으로서 청소년대표까지 나가고 그러기는 했으나 하드웨어가 얇고 파워보다는 기교파에 가까웠던지라 관심은 받았지만 우선협상대상까지는 아니었어요.

“슈터로서 변신 성공, 뚜렷한 목표의식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Q.경희대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유는 단순하죠. 선택지가 많지않았으니까요.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저는 관심은 받았지만 우선협상대상으로 평가될만한 급의 선수는 아니었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경희대를 선호하지는 않았어요. 저희 때까지 경희대는 강호가 아니었을뿐더러 워낙 훈련량이 많고 분위기가 엄하다고 소문이 났었거든요. 아마때 잘나갔던 선수들은 거의 경희대를 들어가지 않았어요. 늘 그렇듯이 연세대, 고려대, 중앙대 등에 대어급들이 몰렸죠. 제가 입학하고 6~7년후부터는 전국구 유망주들도 한두명씩 스카웃이 되고 그랬지만 그전에는 살짝 밀렸던 선수들이 주로 경희대를 갔죠. 저역시 아주 잘나가지는 않았으니까 경희대를 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Q.장신임에도 슈터로 키워졌어요,

그런 부분에서는 운이 좋았던 듯 싶어요. 저같은 경우 키는 컸지만 마른 체형이었던지라 골밑에서 전투적으로 몸싸움을 벌이고 그러기에는 한계가 있었거든요. 저보다 조금 작아도 근육질에 힘좋은 선수와 골밑에서 붙으면 버거움을 느낄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최부영 감독님께서는 저보다 앞서 장창곤(194cm) 선배를 장신 포워드로 키우려고 했어요. 무엇보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3점슛을 어느정도 쏠줄 알았다는 점도 큰 메리트였죠. 반면 저는 3점슛을 거의 던져보지 못했습니다. 기껏해야 미들슛이었죠. 그런 상태에서 갑자기 3점슛을 쏘려고 하니 갑갑하더라고요. 해보지 않았던 것에 대한 낯설음과 두려움? 그런 것도 적지않게 있었어요.

Q.결과적으로 슈터 전환에 성공하게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뚜렷한 목표가 있었던 이유가 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센터로서 청소년대표를 해봤던지라 이제는 포워드로서 국가대표가 되고싶다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연고대 혹은 중앙대 출신이 아니면 국가대표가 되기 정말 힘들었던 시절이거든요. 비주류 대학출신으로서 그 벽을 넘어보고싶은 마음을 가슴 속에 품었습니다. 그러려면 3점슛을 장착하는 것을 넘어 정말 잘 쏴야 쟁쟁한 선수들과 경쟁이 되지않겠어요. 모 축구선수가 그랬잖아요. 큰 국제무대는 성장하는 것이 아닌 증명하는 자리라고. 제가 고등학교 때까지 센터였는데 대학에서 포지션을 바꾸고 플레이스타일을 재정비했다. 경력에 비해 이정도면 잘하는 것 아니냐? 그런 말들은 최고를 가리는 자리에서는 전혀 쓸모없는 소리잖아요. 제가 국가대표로서 활용가치가 있냐 없냐만이 결정에 영향을 줄뿐이죠. 당시 저희팀에는 바로 1년위에 윤영필 선배가 있었어요. 어떤 면에서는 그 형이 있었기에 저도 포지션 변경이 가능했던 부분도 있죠. 센터로서 큰키는 아니었지만 골밑에서 궂은일 잘하고 투지가 넘쳤습니다. 제가 신입생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최감독님께서는 아마도 그림을 그리지않으셨나 싶어요. 영필이 형이 안에서 싸워주고 저는 내외곽을 오가는 빅포워드로 뛰고요.

 

Q.어떤 장신 선수들은 밖에서 외곽슛을 쏘면 혼이 났다고하던데, 반대로 골밑플레이를 하려고하면 혼이 났다면서요?

그랬었죠. 감독님께서도 저는 체형 등의 한계로 인해 골밑에서 빅맨으로서 대성하기는 쉽지않다고 보셨던 것 같아요. 대신 어느 정도 볼핸들링도 되고 센스도 있어보여 슛거리만 늘리면 되겠다 판단하신거죠. 그러기위해서는 슛을 제대로 장착해야되는데 이게 정말 쉽지않더라고요. 고등학교 때까지 제대로 던져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능숙하게 3점슛을 던지겠어요. 바꿔말하면 슈터 출신에게 갑자기 포스트업 스킬을 익히라는건데요. 어쨌거나 감독님은 저의 여러 가지 모습을 예의주시하시면서 계속해서 지적하시고 혼을 내셨어요. 특히 몸에 배인 습성상 골밑에 들어가서 플레이하려고하면 그야말로 불호령이 떨어졌죠. 지금이야 골밑에서 능숙하게 플레이하면서 외곽에서 슛도 던지는 올 어라운드 플레이어도 많지만 당시는 분업농구가 대세였던 시대에요. 저는 상대에 따라서 외곽슛도 쐈다가 포스트업도 쳤다가 그러고싶었으나 감독님께서는 마음에 들지않으셨던거죠. 골밑을 거의 버리다시피하고 외곽을 돌면서 슛을 던지는 역할을 부여받았는데 마음처럼 되지않더라고요. 조금의 틈만 보이면 저도 모르게 골밑으로 들어가는거에요. 그러면 또 감독님이 버럭하셨고요. 습관을 바꾼다는게 정말 힘들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저도 힘들었지만 감독님도 힘드셨을거에요. 끝까지 뚝심을 가지고 키워주신 부분에 대해서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경희대 출신 특유의 전투력 바탕에는 조기교육의 영향도 컸습니다”

Q.어쩄거나 당시 경희대는 성적이 나쁘지 않았어요. 당시 주축 멤버들도 신인드래프트에서 좋은 순위로 지명받았고요.

기대보다 성적이 꽤 괜찮은 편이었죠. 저나 (강)혁이가 신입생으로 들어왔을 때만 하더라도 저희들이 주축이 된 경희대가 잘 나가는 팀들도 긴장시키는 다크호스가 될 줄은 다들 예상하지못했을거에요.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멤버들은 고등학교시절까지만 해도 이름값에서 높지 않았어요. 툭 터놓고 얘기하자면 경희대가 진정으로 좋아서 입학한 이들은 많지않을걸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거죠. 혁이같은 경우도 프로에서는 대성했지만 경희대에 막 들어오던 시절만해도 동포지션 랭킹에서도 많이 밀렸을걸요. 감독님께서는 그렇게 미완의 대기같은 친구들을 뽑아서 혹독하게 훈련시켰는데 거기서 끝까지 살아남은 선수들은 잡초같은 생명력을 얻게 됐죠.

Q.잡초같은 생명력이라는 말이 확 와닿네요. 경희대 출신들이 유독 근성이 돋보였던 것 같아요.

프로농구 초창기 시절은 농구대잔치 때의 분위기나 문화가 상당 부분 이어져왔잖아요. 훈련량도 그렇지만 투지나 근성을 타의적으로 끌어올리기도 했는데 그 과정에서 때로는 폭언과 폭력도 동반되는…, 경희대 출신들은 그런 쪽에서 이른바 조기교육이 잘되어있던지라 어지간한 상황에서는 주눅들거나 낙담하는 경우가 적었습니다.(웃음) 벼랑끝 맹수처럼 커왔던지라 여기저기 던져져도 끈질기게 잘 살아남았죠.

Q.당시 엄하지 않은 대학 감독이 없었겠지만 그중에서도 최부영 감독은 맹장으로 유명했어요.

거의 탑오브더탑 아니었을까 싶어요. 외부적으로 순둥순둥해보이는 지도자들도 사실은 상당히 무서운 경우가 많은 시절이었는데 감독님은 거의 대놓고 무서운 지도자로 명성이 있었으니까요. 호랑이라고 불리고 막그랬잖아요. 무엇을 상상해도 그 이상일 수 있어요. 어찌보면 그분 입장에서는 그게 최선이지않았나 싶어요. 본인도 비주류 경희대 출신으로서 악착같이 농구판에서 살아남았던 인물이잖아요. 그러한 과정에서 많은 시련이 있었을 것이고 주류대학을 이겨보겠다는 승부욕도 대단했던 분이에요. 하지만 현실은 스카우트 전쟁에서 항상 밀렸던 것이 사실인지라 한가지 정도 잘하던 선수를 데려와 두가지 세가지를 입히기위해 강압적인 방법도 불사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스포츠적인 입장에서보면 선수의 기량과 멘탈에 큰 변화를 주기에는 대학 4년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아요. 감독님은 그 기간동안 최대치를 끌어올리기위해 호랑이가 되었던거죠. 당시 그분 밑에서 농구를 배운 선수들은 대부분 전투력이 끓어넘쳤거든요.

 

Q.최부영감독의 지도방식 등에 관해 뜻을 같이 하시는건가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저역시 너무 힘들었던 사람으로서 당시로 돌아가라면 음…, 자신이 없습니다.(웃음) 시대가 달라지기도 했고 저 개인적으로는 본인이 좋아서 스스로 노력하는 농구를 선호합니다. 지도자는 조언과 공감 등을 통해 동기부여를 유지시켜주고요. 아무리 옆에서 강하게 채찍질을 해도 본인이 흥이나서 뛰는 말보다 빠를 수는 없거든요. 구태여 제가 말하지않아도 감독님의 지도방식은 널리 알려져있고 호불호도 많이 갈리는편이죠. 단지 저도 나이를 먹어가다보니까 그분이 왜 그러셨을까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설마 본인도 좋아서 그렇게했겠습니까. 당시 처한 환경에서 그것이 최선이다고 판단하셨던 듯 싶어요. 제자들을 챙기는것도 악착같으셨고요.

Q.포지션을 바꾸는 과정에서 많이 혼나셨다고했는데 무심하게 말해서 그렇지 당시에는 정말 힘들었겠어요?

말해 무엇하겠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멘탈에 금이가기도 했습니다. 제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이전 선배들까지 포함하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은 내때가 가장 힘든 것이잖아요. 그냥 아주 많이 힘들었습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그래도 나름 저는 제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대학교 들어올 때부터 나름대로의 목표를 정해놓고 꾀부리지않고 한발한발 앞으로 가고있었어요. 누가 강압적으로 하지않아도 스스로 이를 악물고 원하는 방향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던 것이죠. 그런데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혼이 나는 강도가 심해지자 오히려 의지가 꺾일 때도 많았습니다. 무조건 외곽슛을 쏘지않고 한번씩 골밑에서 미스매치를 이용해 포스트업을 치는 등의 행동이 그렇게 심하게 깨질 만큼의 일인가 회의감이 들고는 했어요. 당장 힘든 것도 힘든 것이지만 이런 상황을 버티고 앞으로 내가 목표한 길을 향해 갈수는 있을까? 스스로에게 불신이 생기더라고요. 선수생활의 기로에 서기도 했죠.

“좀 더 치열하게 꿈을 키우고 달리지 못한 것이 후회됩니다”

Q.신인 때부터 덩크하는 슈터로 시선을 모았습니다. 본래부터 덩크슛에 관심이 많으셨나요?

하하핫…, 그랬나요? 저도 잠시 잊고있었는데 갑자기 확 떠오르네요. 저는 그냥 뭐랄까, 덩크슛 자체에 관심이 많았다기보다는 이것저것 다양한 플레이를 하고싶었는데 유달리 신인 시절을 포함해 초창기때 그러한 본능이 마구 표출되었지않나 싶어요. 제가 농담삼아 지인들에게 가끔 하는 말이 있어요. 만약 내가 선수 시절에 현재 나같은 지도자를 만났다면 더욱 성장했을 것이다고요. 제가 특출나게 능력있고 잘 가르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선수마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성향이 다 다르잖아요. 저는 거기에 따라서 다르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잘하는 것이 있으면 그쪽으로 성장 방향을 밀어줄 필요가 있고요. 뭐랄까, 당시에는 정해진 틀에 있었고 개인의 특성에 관계없이 그냥 그렇게 해야됐어요. 내가 거기에 딱 맞는 유형이면 재능있다는 소리도 듣고 확확 성장하겠지만 그 방법에 맞지않고 어울리지 않는 선수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음에도 도태될 수밖에 없겠죠. 저같은 경우 대학에서 뒤늦게 슈터나 포워드로 키워졌잖아요. 당시에는 공간을 찾아다니면서 받아먹기에 능한 슈터가 최고였는데 아무래도 저보다 훨씬 이전부터 슈터로 활약하던 친구들보다 잘하기는 어려웠지요. 경험치 자체가 다르니까요. 거기에 더해 저는 센터 출신이라 발도 전문 슈터들보다 느릴 수밖에 없었어요. 정확히 말하면 슈터로서의 스탭 그런 부분에서 밀렸다는 표현이 맞겠네요. 그래서 당시에 저의 플레이스타일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 많았던 것같아요.

Q.생각의 결론은 무엇이었을까요?

결론이랄게있나요. 저는 어릴 때부터 단순히 한가지만 잘하기 보다는 허재 선배님처럼 이것저것 고르게 잘하는 선수가 되고 싶었어요. 물론 그런 엄청난 선배님을 따라가기는 어렵겠지만 롤모델처럼 생각했다는 것이죠. 때문에 프로에 신인으로 들어가서는 이것저것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많이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슈터로서의 움직임을 충실하게 가져가되 3점슛만 고집하지않고 미들슛이나 드라이브인도 적극적으로 시도했고 기회다싶으면 덩크슛도 과감하게 찍었죠. 특별히 덩크슛에 관심이 많았다기보다는 그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플레이를 망설이지말고 하려고 했던 연장선이었다는게 맞을 듯 싶습니다. 사람의 성장은 호기심과 관심에서부터 시작되잖아요. 프로 초창기 시절의 저는 그게 충만했습니다.

Q.당시만해도 국내 선수들의 덩크슛을 보기 힘들었던 시기였는데 틈만나면 덩크슛을 시도했던 패기는 정말 보기좋았습니다.

덩크슛 얘기를 많이 하시는 것을 보니 그쪽으로 꽂히셨나보네요.(웃음) 뭐랄까, 경희대 입학할때도 그랬지만 프로에 오면서도 마음 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과 다짐을 했어요. 특히 경희대 시절에는 이것저것 눌려져있어서 못한 것도 많은지라 프로에서는 한번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보여주고 싶었던 마음도 컸습니다. 그래서 돌파도 더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시도했고 눈앞에 림이 보이면 레이업이든 덩크슛이든 가리지않고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공격을 펼친거죠. 특히 덩크슛같은 경우 타이밍이 중요하거든요. 망설이면 안되요. 멈칫하다가는 이도저도 안되니 하겠다싶으면 과감하게 들어가서 찍어야죠. 결정적인 상황에서의 득점 더욱이 덩크슛으로 득점이 터져나오면 팬분들도 좋아해주셨어요. 그렇게 보여주는 것도 프로라고 생각합니다.

Q.서장훈 선수를 앞에 두고 인유어 페이스 덩크를 찍었던 모습도 명장면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어요.

아…, 기억나죠. 당시 제가 코뼈 부상을 당해 안면마스크를 하고 뛰었던 시기였어요. 경기중 레이업슛을 하려고 떴는데 수비수였던 김재훈 선배하고 충돌이 있었어요. 그 과정에서 팔꿈치에 맞아서 코뼈가 부러져버렸죠. 선배는 당연히 고의성이 없었을테고 다분히 운이 좋지않았던 상황입니다. 마스크를 쓰고 경기에 나설 수밖에 없었죠. 사람이 참 희한하게 다치고나면 더 용맹스러워지는 부분이 있어요. 특별히 뭔가를 할 생각은 없었는데 마침 기회가 왔고 빈틈이 보인다싶어서 과감하게 덩크슛을 시도했죠. 상대가 누군지 크게 의식할 겨를도 없었어요. 서장훈 선배는 국내 최고의 빅맨이잖아요. 의식했으면 아마 실패했을지도 모르죠. 그냥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눈에 림이 보이기에 냅다 뛰어올랐습니다.

Q.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프로 초년병때의 화려한 플레이가 안나오더라고요.

지금은 낭중지추라는 말도 널리 쓰이잖아요. 당시만해도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했어요. 팬분들이야 좋아해주셨지만 신인이 막 덩크 찍어대고 그런 것을 현장에서는 좋게보지않는 분들도 많으셨어요. 무던하게 함께 가는 것을 좋아했지 저처럼 하는 것을 나댄다고 생각했나봐요. 한번은 득점 찬스에서 덩크슛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적이 있는데 경기 끝나고 선배한테 귀싸대기를 맞기도 했어요. 너 혼자만 스타되려고 그러냐. 다음부터는 평범하게 레이업슛으로 하라고 혼을 내시더라고요. 플레이스타일에 대해서 그렇게 지적을 받고 혼도 나고하니까 저도 모르게 자신감이 줄어들더라고요.

Q.프로선수는 자신감이 생명아닌가요?

그렇죠. 눈치를 보다보니까 아무래도 시간이 지날수록 과감한 플레이를 자제하게 됐다고 할까요. 솔직히 연차가 되지 않을 때는 그렇다쳐도 고참이 되어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잖아요. 못하는 것을 억지로해서 팀에 피해를 끼치는게 아니라면 할 수 있는 것은 과감하게 해야죠. 플레이 자체도 화려한 쪽이 팬분들의 눈을 더 즐겁게 할 수 있는 것이고요. 하지만 한번 몸에 배이다보니 초창기 때의 닥돌모드가 잘 안나오지 않았나 싶어요. 대신 노련미나 그런 쪽에서는 더 나은게 있었겠지만 기자님처럼 신인 시절부터 좋게 봐주신 분들 사이에서는 아쉽다는 의견도 많더라고요. 질문을 해주신 덕분에 저도 잊고있던 당시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Q.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창기 모습에 비해서 더 큰 성장이 아쉽다는 의견도 있어요.

맞습니다. 돌이켜보면 여러 이유가 생각나지만 무엇보다 2차 목표에 대한 간절함과 방향성이 부족했던 듯 싶어요. 저는 상상이 현실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중 한명이거든요. 그래서 농구를 하지 않을 때도 여러 가지 생각을 많이하고 목표를 세우고 그랬어요. 신인시절에 특히 그랬고요. 이후에는 더 큰 목표를 세우고 꿈을 꿨어야 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앞서 말했던 눈치보고 그랬다는 것들도 어떻게보면 변명같아요. 저보다 훨씬 더 크게 성장한 선수들에게도 분명 그런 시절이 있었을 것이잖아요. 그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다음 목표에 대한 기준이 명확했고 거기에 맞게 더 치열하게 노력했을거에요. 뭔가 지키려고하고 안주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Q.당시의 경험이 지도자 생활에도 영향을 끼친 부분이 있을까요?

있죠. 적어도 저와 함께하는 선수들에게는 당시의 아쉬움을 주고싶지 않은 마음이 큽니다. 선수마다 재능과 기량의 한계점은 다르겠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원없이 해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도자 생활할 때도 많이 강조했고요. 스타플레이어의 자질을 가진 선수들은 욕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필요도 있어요. 에이스 혹은 클러치 플레이어들은 소위 양날의 검으로 불리기도 해요. 부진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 한방을 터트려서 주인공이 되기도하고 혹은 그렇지못한 경우에는 역적으로 몰리기도 하죠. 하지만 자신이 잘하는 것이 있으면 경기 중에는 망설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순간도 더 많이 찾아올 수 있고요. 이는 출전시간이 많지않은 벤치 멤버들에게도 해당됩니다. 슛에 강점이 있는 선수들에게는 수비에서는 뚫리지만 말고 대신 찬스가 오면 과감하게 쏘라고 말합니다. 한두개 안들어갔다고 멈칫멈칫하면 기용한 의미가 없어지잖아요. 너가 그런 부분에 강점이 있으니까 투입을 했고 거기에 집중을 하면 된다. 그게 지금의 네 역할이다. 들어가고 안들어가고는 다음 문제다. 서너개씩 안들어가면 그날은 슛감이 안좋다고 판단하고 벤치에서 알아서 뺀다. 대신 너가 미리 안좋은 상황을 머리에 담고 플레이하면 이도저도 안된다. 뻔뻔해져라. 비록 벤치멤버지만 기회가 왔으면 자신있게 슛을 던지고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코칭스탭의 판단에 맡겨라. 코트에서 미리 사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강조하는 편이죠.

 

“늘 배운다는 자세로 성장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Q.생각해보면 1976년생중에 프로에서 롱런한 선수들이 많은 것 같아요.

말씀 듣고나니 그렇네요. 조상현, 조우현, 황성인, 강혁, 조동현, 하상윤 등 잘하기도했지만 선수생활을 오래가져간 케이스가 확확 떠오르네요. 사실 저희 학번이 황금세대하고는 다소 거리가 있어요. 1970년대 초중반생들이 선배님들인데 워낙 쟁쟁한 스타들이 많으셔서 아마시절에는 다소 밀렸 아니 눌렸다고나 할까요.(웃음) 문경은, 조성원, 이상민, 전희철, 김병철, 양희승, 홍사붕, 김승기, 현주엽, 신기성 등 이름값만으로 상대를 긴장시키던 에이스급 선수들이 유독많이 쏟아져나왔던 시기죠. 하지만 프로에서는 조금 달랐습니다. 저희 학번도 만만치않았거든요. 학창시절부터 에이스나 주포로 활약하는 등 확실한 자기 역할을 많이 가져가며 뛰었던 선수들같은 경우 프로에서 역할이 줄거나 다른쪽으로 플레이를 요구받고 그렇게되면 단명하는 케이스도 있었던 듯 싶어요. 하지만 저희 학번은 뭐랄까 중간부터 시작했던지라 자생력이라고 할까요? 그런 부분에서 나름 강했죠. 본인이 선호하지 않는 쪽 역할을 맡거나 그래도 악착같이 잘 살아남았거든요.

Q.가슴 아픈 흑역사이겠지만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경기중 후배 기승호를 팔꿈치로 가격한 다음부터 이미지가 조금 안좋아지기는 했어요.

아이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죠.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고요. 기승호가 현대모비스 회식자리에서 폭력 사고를 일으켰잖아요. 그때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아, 또 다시 나도 같이 언급되겠구나 싶었는데 아니라 다를까 여기저기에서 당시 일이 다시 소환되더라고요. 이래서 선수는 정말 은퇴하는 그 순간까지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될 필요가 있는 듯 싶습니다. 솔직히 무슨 말을 해도 변명같고 저 자신도 마음이 무거워지지만 먼저 물어보셨으니까 대답은 해드려야겠죠. 기승호 그 친구와는 나이 차이도 많이나지만 프로에 오기 전부터 연습경기도 많이하고 그러면서 서로 익숙한 사이였어요. 2009년이었죠. 제가 전자랜드 소속이었고 기승호는 LG에 갓들어온 신입이었죠. 당시 서로 매치업이 되어서 경기를 하는데 수비시에 유달리 거칠더라고요. 거친 것은 좋아요. 코트에서 선후배가 어디있어요. 서로 필사적으로 공격하고 막고 하는것이죠. 문제는 선을 넘었다는것이에요.

Q.선을 넘다니요?

사실 단순히 기승호가 수비를 잘해서 제가 가로막힌 것이라면 선배 입장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요. 매치업에서 실력적으로 밀린건데 거기에 대해서 무슨 토를 달겠습니까. 하지만 당시 기승호의 수비는 그런게 아니었습니다. 자칫하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움직임이 계속 이어졌어요. 점프했다 내려오는 순간 자꾸 밑으로 들어오더라고요. 아찔한 상황이 계속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안되겠다싶어 옆에 가서 계속 말했어요. 거칠게 수비하는 것은 좋은데 서로 다칠 수 있는 플레이는 하지말자고요. 그런데도 멈추지를 않는거에요. 너 진짜 그러면 안돼. 이것은 아니야라고 세 번째까지 계속 경고를 했어요. 더욱이 제가 허리부상을 당해서 허리쪽에 되게 민감한 것이 있었는데 한번은 넘어진 저의 허리쪽을 향해 무릎으로 들어오는거에요. 순간 이성의 끈이 끊어져버렸습니다. 결국 해서는 안될 행동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Q.너무 대놓고 치셔서 깜짝놀랐어요.

휴우…, 그러게요. 어떤 분은 농담식으로 그렇게 화가났으면 요령있게 보복할 수도 있는데 왜 그렇게 대놓고 쳤냐고 말하더라고요. 제가 그런 요령있는 보복을 해본적도 없거니와 그렇게 이성이 살아있었으면 평생 후회할 짓을 안했겠죠. 물론 이런 말로 당시 저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런 식이면 세상의 모든 폭력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겠죠. 깊이 후회했지만 때는 늦어버렸고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후회하고 반성하고 있습니다. 뭐 좋은 일이라고, 어디가서 이런 얘기 잘하지 않아요. 제 얼굴에 침뱉기니까요. 인터뷰를 통해서 물어봐주셨고 대답을 드려야되나 말아야되나 순간적으로 갈등이 됐지만 어차피 백번천번 제가 잘못한 것,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는게 맞겠다 싶었습니다. 후배 선수들에게도 말하고 싶어요. 봐라. 경기 중에 일어난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오랜시간이 지나서도 계속해서 언급되고 혼나고 반성하고 있다. 절대로 후회할 일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요.

Q.당시 사건이 선수 생활 후반기나 지도자 인생 등에도 영향을 끼쳤을까요?

아무래도요. 좀더 마음을 내려놓게 되고 상황에 대해서 깊은 이해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격한 상황이 와도 몇 번씩 더 되내여 생각해보고 최대한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대처하려고 노력하다보니 나중에는 조금씩 몸에 배이더라고요. 더불어 직접적으로 연관은 없지만 말보다 행동으로 솔선수범해야 할 때도 많구나 하는 것도 나이들면서 배우고 있습니다. 유재학 감독님을 따라서 아시안게임에 국가대표로 갔을 당시에도 저를 왜 뽑았을까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기억이 나요. 당시 저는 노장으로서 전성기가 한참 지나있었거든요. 감독님께서 고참으로서의 제가 필요한 부분에 대해 짧게 말씀해주셨고 거기에 맞게 행동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감독님이든 후배들이건간에 이런저런 얘기들을 할 때 옆에서 말을 잘 들어주려하고 훈련같은 것도 젊은 선수들보다 더 성실히 임하려고 했습니다. 은퇴후 NBA 피닉스 선즈 산하 D리그 팀에서 객원코치로 경험을 쌓을 때도 그랬습니다. 지원을 받아서 공식적으로 간 것이 아닌 개인적으로 갔던 것인지라 처음에는 무시도 많이 받았어요. 저보다 한참 어린 친구들이 저에게 청소 등 잡일을 시키고요. 멘탈에 금이 가려던 찰나 생각을 바꿔먹었지요. 내가 미국에 대접받으러왔나? 배우고 경험하러왔잖아. 다음날부터 한시간 일찍 출근해서 미리 청소하고 이런저런 허드렛일을 해버렸습니다. 시키서 하는 것하고 자발적으로 하는 것은 또 기분이 다르더라고요.(웃음) 그러다보니 진심이 통했는지 그 친구들도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던 기억이 납니다.

Q.짐캐리라는 별명도 있었는게 기억나세요?

그럼요. 제가 좀 평소에도 뭔가의 특징을 캐치하는 능력이 좋은편이에요. 언젠가 어떤 분이 눈에 피로가 많이오시죠?라고 물어오는거에요. 그래서 어떻게 아셨냐고 맞다고 했더니 그런 것 같다. 남들보다 사물을 꿰뚫어보는데 많은 에너지를 쓰는 것이 보인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어릴 때부터 영화나 만화 캐릭터들의 특징을 잡아서 따라해보고 그런 적이 많았거든요. 짐 캐리같은 것도 프로에 와서 보여줄 개인기같은게 있을까 싶어서 생각하다가 마침 마스크 영화가 대박이나서 그것을 보고 따라해봤더니 많은 분들이 빵빵 터지시더라고요.(웃음) 당시부터 별명이 김캐리가 되기도 했죠.

Q.마지막으로 농구인 김성철을 응원하는 팬 분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래저래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임에도 응원하고 격려해주시던 팬분들의 목소리 지금도 잊지않고 있습니다. 좀 더 잘하고 멋진 모습 보여드렸어야 하는데 때론 실망도 안겨주고 그런점 지금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늘 배운다는 자세를 잊지않고 한걸음씩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기위해 늘 노력하겠습니다. 봄이 다가오고 있네요. 봄햇살처럼 따뜻하고 좋은일 가득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KBL 제공, 본인 제공, 박상혁 기자

기사제공 점프볼

김종수 oete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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