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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원주 DB와 함께해서 늘 행복합니다

농구인터뷰

by 멍뭉큐라덕션 2023. 10. 10.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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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원주 DB와 함께해서 늘 행복합니다

기사입력 2023.10.03. 오전 09:01 최종수정 2023.10.04. 오전 01:27

[김종수의 농구人터뷰(87)] ‘미스터 원주’ 이흥섭

‘솔직히 처음 프런트 제의를 받았을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할수 있을 것이다고는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단 1년을 하더라도 좋은 경험이 되겠다 싶었고 좀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정말 열심히 뛰었습니다. 더불어 추후 저와 비슷한 입장에 서게 될 수도 있는 후배들에게 다양한 길이 있다는 선례도 남기고 싶었고요“

농구인으로서 성공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많은 이들은 일단 선수로서 굵직한 커리어를 남기는 것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팀을 우승으로 이끌면서 다양한 수상 실적도 쌓고 거기에 누적 기록도 차근차근 쌓아 올리면 어느새 레전드라는 명성이 따라붙는다. 꼭 해당 사항을 모두 만족시키지 않고 1~2가지만 제대로 해도 임펙트에 따라서 이름을 남기는 것이 가능하다.

선수로서 아쉬운 커리어를 남겨도 지도자라는 방법이 있다. 프로 무대서 롱런하며 이름을 남긴 인물 중에는 현역시절에는 ’그런 선수가 있었나?‘싶을 정도로 철저히 무명이었던 케이스도 적지 않다. 하지만 당시의 설움을 지도자로서 씻어내며 선수 시절까지 재조명되기도 한다.

다소 드물기는 하지만 프런트로서의 알려지는 경우도 있다. 비선수 출신들도 많고 무엇인가를 잘해도 어지간해서는 눈에 띄지 않는 자리인지라 성공이라는 기준이 모호하기는 하다. 하지만 실제로 선수 출신 단장은 물론 사장 직함까지 달아본 인물도 존재한다. 적성에 맞다면 충분히 도전해볼만한 영역이다.

여전히 진행형이기는 하지만 이흥섭(51‧198cm) 원주 DB 사무국장 역시 성공한 프런트의 길을 가고 있다. 1996년 동양제과 농구단에 입단해 2000년 삼보 엑써스(현 DB)에서 은퇴하며 짧은 현역시절을 마쳤다. 선수로서는 분명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흥섭의 농구 인생은 은퇴 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2001~02시즌 운영팀 대리로 시작해 운영팀장, 운영 홍보과장을 거쳐 2021년부터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은 원주 DB 한팀에서만 만들어가고 있는 프런트 커리어라는 사실이다. 선수 시절부터 포함하면 무려 27년동안 원주에서만 활동하고 있다. 원주의 전설로 통하는 김주성 현 감독보다도 더 오래 있었다.

이정도면 가히 프랜차이즈 스타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흥섭 본인은 말도 안된다고 손사래를 치지만 프랜차이즈 스타, 원클럽맨이 어찌 선수에게만 해당되겠는가. 주변의 원주 팬들에게 물어보니 ”30년 가까이 원주 농구를 위해 공헌해온 그가 프랜차이즈가 아니라면 누가 프랜차이즈겠냐“고 오히려 반문을 해왔다. 때문에 기자 역시 그의 이름 앞에 ‘미스터 원주’라는 별명을 붙여보았다.

 

 

“장신 집안요? 저하고 (이)규섭이가 유달리 크기는 하죠”

​​​​Q.어떻게 명절은 잘 보내셨나요?

다들 그렇다시피 가족들과 명절을 보냈습니다. 저희 형제들도 다 서울 출생이고 본가 및 처갓집 모두 서울에 있는 관계로 따로 시간내서 다른 지역으로 넘어가지 않아도 되는 점은 편하네요. 오늘은(인터뷰하기 몇 시간 전) 오래간만에 가족들끼리 극장에 가서 ‘1947 보스톤’을 보고왔습니다.

​​​​Q.이규섭 SPOTV의 해설 위원의 형으로도 유명한데 형제 관계는 어떻게 되시나요?

3형제에요. 제가 둘째로 1972년생 막내 규섭이가 1977년생 그리고 큰형님이 계신데 1968년생으로 조금씩 터울이 있는 편입니다. 저도 저이지만 큰형과 셋째 규섭이는 9살 차이가 나요. 부모님께서 은근히 딸을 바라셨던 눈치셨는데 낳고 보니 아들이었고 그렇게 3형제가 완성된 거죠. 그래도 규섭이가 선수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냈고 부모님과 형들에게도 살뜰히 잘하는지라 딸 같은 아들이 아닐까 싶습니다.(웃음) 저하고 규섭이만 농구를 했고 형은 운동 쪽으로는 가지 않았는데 대신 공부를 되게 잘했어요.

​​​​Q.사무국장님도 공부를 잘했다고 그러던데요.

하하핫…, 그 부분은 조금 와전된게 있어요. 사실 큰형에 비하면 잘한 것도 아니고요. 제가 농구를 늦게 시작했거든요. 중학교 졸업하고 고등학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농구공을 잡았으니까요. 아버지께서는 제가 키도 크고 그러니까 운동 쪽으로 가기를 원하셨어요. 하지만 어머니는 제가 공부도 그럭저럭하고 그러니까 평범하게 가는 쪽을 선호하셨고요. 운동선수의 길이라는게 잘되면 정말 좋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미래를 보장하기 힘들잖아요. 안정적인 삶을 살기를 바래셨던 것이죠. 중학교 시절 한반에 60명 정도 있었는데 5~10등 사이했어요. 그냥 반에서 조금 하는 정도였다고 보는게 맞겠네요.

​​​​Q.이규섭 위원과 함께 프로필 키가 198cm로 기재되어있던데, 운동선수의 길을 가게된 배경에는 남다른 사이즈의 영향이 컸을 듯 싶어요. 더불어 형님 분께서도 체격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짐작되는데, 의외로 운동 쪽으로는 안 들어갔네요. 보통 그 정도로 크면 각종 종목에서 러브콜이 쇄도하기도 하잖아요.

음…, 저와 규섭이가 남다르게 큰 것은 맞죠. 하지만 형님은 그 정도로 크지는 않아요. 178cm정도 되거든요. 일반인으로서는 그래도 크다면 큰 편이지만 운동선수 쪽으로 보면 특별할건 없죠. 그냥 같은 형제라도 성향과 적성이 달랐다고 보는게 맞을 듯 싶어요. 일단 저나 규섭이가 농구선수의 길로 가게 된 배경에 사이즈가 영향을 끼친 부분도 분명히 있죠. 더불어 아버지가 운동을 좋아하시던 분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을 듯 해요. 한국전력을 다니셨는데 젊은 시절부터 테니스를 정말 즐기셨어요. 회사 인근은 물론 집 근처에도 테니스를 칠 수 있는 코트장 회원가입을 해놓으시고 시간이 조금이라도 나면 바로 달려나가셨을 정도니까요. 주말 같은 경우 새벽같이 나가셔서 저녁에 해가 지고 컴컴해져서야 집으로 돌아오시곤 했어요. 그때는 야간 조명 시설같은게 잘 안되어있던 시절이었잖아요. 아마 요즘같이 잘 갖춰져 있었다면 밤늦게까지도 하시지 않았을까 싶어요. 지금은 연세가 있으셔서 그렇게는 못하시지만 정말 운동을 즐기셨고 저와 규섭이 역시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적지않은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Q.아버님도 키가 크셨나요?

큰 형과 비슷해요. 178cm정도 되니까 아주 크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1941년생이라는 나이를 감안하면 당시 분들 기준으로는 큰 편이시지 않았을까 싶어요. 사실 저와 규섭이는 신장 쪽으로는 할아버지를 닮지않았나 싶은 생각도 들어요. 할아버지가 아버지보다 크셨거든요. 저와 규섭이만보면 저희 집안이 상당한 장신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아요. 눈에 띌 만큼 큰 사람은 저희 둘 뿐이거든요. 나머지 분들은 평균보다 좀 큰 정도가 많은 것 같아요. 그렇게보니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전체적으로 신장이 좋은 것은 사실이네요.(웃음)

​​​​Q.농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된 것인가요?

오광택이라고 규섭이랑 쭉 같이 농구하던 동기가 있는데 그 친구 아버님이 저희 중학교 때 체육 선생님이셨어요. 저같은 경우 3학년 시절 학력고사를 치르고 고등학교 배정까지 끝난 상태였거든요. 그런 상황에서 선생님이 오셔서 부모님께 저를 농구를 시키는게 어떻겠냐고 제의하셨고 그렇게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게 됐습니다. 더불어 이런저런 사정과 더불어 농구도 배워야 되어서 1년을 쉬게 됐고요. 대경상고같은 경우 그것과는 상관없이 시험을 쳐서 들어갔어요. 그 과정에서 학생 대표로 선서도 했고…, 무엇보다 당시 운동부는 아예 공부를 안하다시피하던 시절이었어요. 때문에 운동부 친구들을 한반에 몰아넣지 않고 각 반 별로 고르게 배정을 해요. 아무래도 반 평균을 깎아 먹을 수 있는 부분이 있었을테니까요.(웃음) 저같은 경우는 거기에 해당되지 않으니까 선생님들도 기특하게 보셨나 봐요. 그래서인지 수업시간에 제 얘기를 유달리 많이 했고 본의 아니게 공부를 아주 잘했던 것으로 과장되어서 소문이 나게된거죠.

​​​​Q.요새 농구인 2세들이 뜨고 있는데 혹시 농구하는 자녀는 있나요?

아니요. 딸만 둘인데 농구는 시키지 않았습니다. 안 시킨 이유는 단순해요. 결혼하기 전부터 아들은 의지만 있다면 괜찮을 듯 싶었지만 딸은 구태여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다들 아시다시피 운동의 길이 보통이 아니잖아요. 딸을 좀 더 곱게 키우고 싶은 아빠의 마음이라고나 할까요. 아, 오해는 하지마세요. 운동을 하는 여성분들이 곱지 않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멋진 분들도 엄청 많죠. 다만 지극히 개인적인 아빠의 마음일 뿐이었다고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뭐, 아무튼 그랬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아빠가 농구 관련 일을 하고 있고 어릴 때부터 많이 보다보니까 이 녀석들도 꽤 관심은 있더라고요. 특히 큰딸 같은 경우는 상당한 농구 팬이에요. 대학다니면서 봉사활동으로 지체 장애우들과 농구를 같이하는 프로그램도 참여하는 등 꽤 적극적으로 친근함을 드러내더라고요. 그러다가 지난 코로나 시기 때 농구기록원 교육같은 것을 배워서 현장을 한번 경험하는 것은 어떠냐고 권유해봤어요. 그랬더니 금세 이수하고 지금은 대학, 아마리그 등을 다니면서 아르바이트 형식으로 기록원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즐기는 것은 좋아보이더라고요.

“저도 이렇게 오래할줄 몰랐습니다”

​​​​Q.​​​​사무국장이란 어떤 일을 하는 자리인가요?

팀에서 해야 될 이런저런 업무를 총괄하는 자리입니다. 아! 총괄이라는 의미는 승인이 아닌 일 자체를 뜻합니다. 승인은 단장님이 하시는 것이고 현장에서는 감독님이 관리를 하시죠. 프런트는 경기 전후 준비, 각종 업체선정, 선수단 관리, 연봉협상 등 코트 안팎에서 서포터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거기서 어느 정도 권한도 있지만 책임도 큰 자리가 사무국장이라고 보면 맞겠네요. 저같은 경우 선수 출신인지라 그런지는 몰라도 초창기부터 각종 홍보, 이런저런 기준 정하기, 운영방침 등 선수단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일을 특히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큰 틀은 비슷하겠지만 각팀 사무국장마다 디테일한 부분은 조금씩 차이가 있을 수도 있고요.

​​​​Q.외부선수 영입같은 일도 거기에 포함되죠?

그렇죠. 이번 비시즌간 FA로 서민수, 김영현선수를 영입했는데요. 그런 부분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론 팀내 부족한 포지션이 어디고 어떤 선수가 들어오면 전력이 도움이 되겠느냐는 등의 부분은 감독님께서 결정하고 요청할 부분이겠죠. 그렇게 현장과 구단에서 결정이 나면 선수를 만나서 조건을 제시하고 의견을 조율하는 등의 역할은 저희가 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영입할 선수의 가치 평가, 기존 선수들과의 형평성 문제 등 여러 가지 부분을 고려하게 되는데 무엇보다 일관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매년 혹은 상황별로 달라지면 곤란하잖아요.

 

​​​Q.오랜시간 동안 프런트 일을 한 내공이 느껴지는 대목이네요.

하하핫…, 내공이라고 하면 거창하고요. 오랜시간 한팀에서 일을 하다보니 저만의 노하우가 생긴 정도죠. 아직도 부족한게 많고 그것을 알기에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여러 가지 부분에서 배워나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제가 2000년에 삼보 엑써스를 은퇴하고 프런트로 들어왔어요. 선수로서 계약 기간이 1년 남은 상태였고 현재 KCC 최형길 단장님이 이곳에서 사무국장님으로 계실때죠. 제가 당시 허재 선배님과 룸메이트였어요. 원정경기 등을 가면 방을 같이 썼으니까요. 선배님께서 저에 대해서 좋게 말씀을 해주셨는지 당시 사무국장님께서 계약기간이 1년 남았는데 그 기간 동안 사무국에 나와서 일을 좀 해보면 어떻겠냐고 의견을 주셨습니다. 정확한 뜻은 모르겠지만 쭉 이곳에서 정직원으로 자리를 보장해주겠다는 것은 아닌 듯 싶었고요. 말 그대로 1년동안 사무국 일을 경험해보라는 의미로 들렸습니다. 물론 백번 이해합니다. 아직 일도 시작안해본 사람을 보장해준다는 것도 형평성에 맞지 않을 수 있잖아요. 어디서나 필요한 부분이겠지만 최소한의 검증은 필요한거죠.

​​​Q.결과적으로 그 1년이 27년이 되었네요.

그러게요. 2000년 7월 1일부터 출근해서 지금도 다니고 있네요. 어쨌든 당시 들었던 생각은 제가 추후에 농구 관련된 일을 하던, 자영업을 하던 1년간 회사생활을 경험해 보는 것도 큰 자산이 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문서, 공문 주고받고 거래처와 소통하고 그런 부분은 한번 배워보고 싶었어요. 이후 나름 노력도 했고 주변에서도 좋게 봐주셔서 기간이 쭉 길어지게 됐네요. 직책도 올라갔고요. 2005년도에 TG삼보에서 동부로 모기업이 바뀌었습니다. 사실 그때 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어요. 인수되는 과정에서 기존 사무국 직원들을 그대로 승계하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오래가지는 않거든요. 되도록 본인들이 운영하려고 하죠. 하지만 전 구단주이셨던 부회장님을 비롯해 많은 분들이 좋게 봐주셨고 그 덕에 쭉 하던 일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사무국장까지 맡겨주실 줄은 정말 몰랐는데 믿어주시고 인정해주셔서 너무 감사할 따름입니다.

​​​Q.원주의 상징이라는 김주성 현 감독보다도 더 오래 있었네요. 원주 농구팀에서 가장 오랫동안 있었던 남자일까요?

단순히 기간만 놓고 따진다면 현 감독님보다 더 오래 있었던 것은 맞죠. 선수 김주성을 신인드래프트에서 선발할 때 최형길 단장님, 전창진 감독님 등을 도와서 프런트 직원으로 일하고 있던 때이니까요. 말 그대로 그냥 오래되기만 한 프런트 직원일 뿐인데 갑자기 원주의 전설 이름을 들이대시니까 당황스럽네요. 그리고 가장 오래 있었냐는 질문에는 아니라고 답해드립니다. 일단 선수단 버스 기사님께서 가장 오래 계셨어요. 원년부터 계셨으니까요. 또 누가 계실지는 잠깐 생각해봐야겠네요. 선수가 아닌 저같은 프런트 직원까지 통틀어 농구팀 전체로 따진다면 함께 해주시는 모든 분을 대상으로 보는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1997년 프로 출범할 때 오리온 창단 멤버로 함께 했고요. 이후 그해 12월에 나래로 트레이드되었어요. 그게 원주하고의 첫 인연이었죠. KBL에서 선수대 선수 트레이드로는 1호로 알고 있습니다. 그냥 선수만 딴 팀으로 간 케이스는 이전에도 있었지만요, 그리고 2000년에 현역생활을 은퇴했죠. 그해에 동생 규섭이가 삼성에 전체 1순위로 입단했고요.

​​​Q.김주성 감독과는 선수 시절부터 참 오랜시간 함께해서 손발이 잘 맞을 듯 싶어요.

이제 막 김감독이 감독 생활을 시작하는 것인지라 뭐라고 말씀드리기는 조심스럽지만 제 생각으로는 서로 잘맞을 듯 싶어요. 감독대행으로서 잠깐 겪기도 했고 무엇보다 오랜 시간 함께하면서 서로의 성향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김감독이 2002년에 프로 무대에 입성했거든요. 지도자 연수기간을 빼더라도 20년을 함께 했다고 할 수 있죠. 워낙 능력있고 한명 한명 배려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선이 굵으면서도 디테일하고요. 선수로서 DB를 명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것처럼 지도자로서도 그 못지않은 업적을 남길 것이다고 믿어봅니다. 저도 열심히 도와야죠. 김감독같은 경우 탁월한 기량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고 레전드반열에 오른 인물 아닙니까. 반면 저는 운도 꽤 따른 케이스라고 생각합니다.

​​​Q.운요? 어떤 면에서요?

은퇴하고 프런트로 들어간 시기도 마침 잘 맞았다고 생각하고요. 동부로 모기업이 바뀌면서도 다행히 하던 일을 이어갔고 팀에서 믿어준 덕분에 지금까지도 원주맨으로 일할 수 있었습니다. 선수 생활도 마찬가지에요.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저는 고등학교 때 농구를 늦게 시작했던케이스라 기본기도 부족했고 경험도 딸릴 수밖에 없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농구붐을 타고 조금이나마 낄 수 있었죠.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지만 만화 슬램덩크, 드라마 마지막 승부 등 그야말로 농구 관련 컨텐츠가 빵빵 터지던 시기였으니까요. 마지막 승부같은 경우 모교 한양대에서 촬영을 했던 기억이 나요. 거기서 주인공 장동건이 소속되어있던 팀이 한영대인데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양대를 모티브로 했죠. 복병이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강팀은 아니다는 공통점도 있고요. 공교롭게도 마지막 승부가 뜬 그해에 저희가 대학리그에서 우승까지 거둬서 더더욱 잊혀지지 않는 드라마이기도 합니다.

​​​Q.사무국장님도 꽤 주목을 받았을까요?

다들 아시다시피 제가 엄청 유명한 선수는 아니었잖아요. 당시 실업 및 대학리그에 쟁쟁한 스타급 선수들이 너무 많기도 했고요. 좋은 선후배들의 힘으로 한양대가 우승도 하고 그런 상황에서 저도 힘을 조금 보태서 대회 ​​​MVP를 수상한바 있습니다. 대학선발에도 뽑혔고요. 거기에 다른 포지션보다 유독 센터가 귀했던 덕분에 프로가 생기기 직전 기대보다 많은 계약금을 받고 오리온에 입단할 수 있었죠. 늦게 농구를 시작한 것치고는 이래저래 운이 많이 따랐다고 봅니다. 은퇴하자마자 프런트로 일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연장선이었고요.

“팀과 연고지간 활발한 소통이 원주 정착의 가장 큰 뿌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Q.얼마전 전주 KCC가 부산으로 연고지를 이동하면서 한창 시끄러웠잖아요. 어찌됐든 그 과정에서 원주 DB가 다시 한번 재조명되기도 했어요. 원년부터 연고지를 바꾸지 않은 것을 비롯 비수도권, 비영남권 유일의 프로농구 팀이 되었잖아요.

그러게요. 연고지가 바뀐다는 것은 쭉 해당팀을 응원하던 팬들에게 너무 잔인한 것 같아요. 하지만 팀마다 사정이 있는지라 제가 함부로 언급할 말은 아닐 듯 싶습니다. 그럴 의도가 없었다 해도 말이라는 것이 아다르고 어다른지라 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 있죠. 더욱이 현장에 있는 사람이니까 더더욱 그렇습니다. 저는 DB의 사무국장이니까 저희팀 얘기만해야죠. 저희가 연고지를 굳건하게 뿌리내릴 수 있었던 데에는 팀의 의지, 팬들의 사랑도 당연히 큰 이유로 작용했지만 원주시의 전폭적인 지원도 빠질 수 없는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나래 시절부터 클럽하우스가 원주에 있었다는 점도 선수단과 팬, 원주시의 유대관계를 더욱 끈끈하게 했을 듯 싶고요.

​​​Q.말씀하신대로 원주시의 농구단에 대한 관심은 그 어떤 지역보다도 높은 듯 보여요.

맞습니다. 제가 DB의 사무국장으로서 입에 발린 소리를 하려는게 아니라 팩트만 따져봐도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부분이죠. 체육관만 봐도 그렇죠. 2013년 8월 원주시가 500억원을 들여 2만 3000㎡ 부지에 원주종합체육관을 건립했고요. 팀도 원주라는 도시에 만족하고 있는 가운데 시에서도 이른바 잡은 물고기라도 생각하지 않고 계속해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당연히 팀 입장에서도 원주시에 고마울 수밖에 없고요. 어떻게하면 원주시를 더 알릴 수 있을까라는 궁리를 많이 합니다. 지금은 몇 개 구단이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유니폼에 연고지역명을 새겨넣은 것도 저희가 처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지자체와 팀이 어디가 이익을 보고 손해를 본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서로 상생한다는 개념으로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항상 좋은 사이가 유지되고 있지 않나 싶어요. 이런게 윈윈이 아닐까요.

​​​Q.원주시의 농구단에 대한 애정이 부러운 타팀 팬들도 많을 듯 싶어요.

그럴까요? 다른 팀과 지역들도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요. 어쨌거나 상대적인 비교는 맞지 않을 듯싶고요. 다만 원주시 역시 거기에 못지않게 애정을 주고있다고 보는게 맞을 듯 싶습니다. 저희가 피부로 느낄 정도니까요. 언젠가 일부 구단에서 시티 유니폼을 제작해서 호평을 받았잖아요. 원주시도 거기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더욱 눈에 띄는 것은 상금을 걸고 공모전을 치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서 더욱 많은 관심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정말 좋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사기업인 DB구단의 유니폼을 시에서 공모전을 열어 상금까지 푼다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런 원주시의 진심을 느껴본게 한두번이 아니기 때문에 저희 DB 역시 작은 것 하나라도 시와 함께하려고 노력중입니다. 그렇게 당선된 유니폼을 시즌 중 두 번에 걸쳐 홈, 원정때 입는데요. 해당 유니폼에는 모기업 광고를 모두 뺍니다. 그리고 가슴에 원주 두글자만 박아넣습니다.

​​​Q.명절 기간인데도 인터뷰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어차피 저는 특별한 취미나 관심사도 없어서 농구 얘기할 때가 가장 좋습니다. 솔직히 제가 개인 인터뷰를 할만한 사람일까에 대해서 잠깐 망설임은 있었어요. 하지만 선수로서 커리어가 별로 좋지 못해도, 지도자 쪽으로 가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농구 관련 일들도 충분히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더불어 제가 27년간 몸담고 있는 멋진 팀과 도시에 대해 자랑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웃음) 항상 변함없이 응원해주시는 우리 원주 팬분들에게는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올시즌도 흥미로운 라이벌전, 스토리 등이 용솟음치며 많은 관심 속에서 흥하기를 기대합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 제공

기사제공 점프볼

김종수 oete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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