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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출신인 저보다 남편이 농구를 더 좋아해요”

농구인터뷰

by 멍뭉큐라덕션 2023. 3. 31. 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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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출신인 저보다 남편이 농구를 더 좋아해요”

기사입력 2023.03.28. 오전 09:01 최종수정 2023.03.28. 오전 09:01

[김종수의 농구人터뷰(74)] '릴리 오브 더 밸리' 권혜미

“제가 1이라는 숫자와 인연이 많아요. 중학교 때까지는 전국 랭킹 1위로 평가받았고 이후 프로에 들어와서는 통산 1게임 나와서 1리바운드, 1어시스트가 전부입니다. 득점은 골밑슛이 2득점, 3점슛이 3득점이라서 일부러 안했나싶기도 해요. 하하핫…, 하지만 이제는 세상에서 저에게 가장 소중한 1번인 남편과 아들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답니다.”

스티즈 농구교실 권혜미(41‧175cm) 코치의 이름을 기억하는 팬들은 많지않다. 아마시절에는 나름 유명했지만 프로무대서 보여준게 너무 없었기 때문이다. 마니아 팬들은 ‘아쉬운 선수였지’라고 기억할지도 모르겠으나 일반 팬들에게까지 알려지기에는 이래저래 너무 부족했다.

고등학교 시절 부상, 학교 사정 등 여러가지 요인으로 인해 비교적 부진했음에도 2001 WKBL 신입선수 선발회에서 1라운드 전체 5순위로 현대 하이페리온의 지명을 받은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촉망받는 기대주였다. 돌파, 패싱능력, BQ 등을 고르게 갖췄다는 평가를 받으며 중학시절까지 또래 중에서 가장 앞서나갔다.

“모든게 핑계였던 것 같아요. 부상이 있기는 했지만 농구하면서 어디 한두군데 안다치는 선수있나요. 이겨내고 또 이겨내면서 끝까지 버티는 선수가 살아남는 무대잖아요. 선일여고 시절 갑작스럽게 팀이 어려워지면서 순수하게 농구에만 집중하기 어려운 환경이기는 했어요. 나름 소녀가장 역할도 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현실에 너무 갇혀있지 않았나 싶어요. 장애물이 있으면 깨고 밖으로 나와 더욱 멀리 치고 나갔어야 하는데요. 그때는 여고시절이라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못했던거죠”

운동선수로서 프로까지 진출한 선수들의 승부욕은 일반 사람들의 상식을 훨씬 뛰어넘는다. 정말 독하게 운동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위치까지 갈 수 없다. 때문에 자신의 지난 날을 되돌아봤을 때 만족보다는 아쉬움을 표하는 이들이 더 많은데, 하물며 중학 시절까지 전국에서 알아주던 기대주 출신이었다면 그러한 마음은 더 컸을 것이다. 동시대에 함께 경쟁했던 김은혜 KBSN SPORTS 해설위원, 방지윤 숙명여중 코치 등도 꽃을 피우지못한 대표적 선수로 권혜미 코치를 꼽을 정도다.

“솔직히 프로에서 그렇게 나간 순간부터 저와 그 친구들의 커리어는 비교조차 할 수 없게 되어버린거죠. (김)은혜야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고 (방)지윤이도 더 오래버티지 못한게 아쉽다고 종종 말하지만 제 입장에서보면 너무 대단합니다. 이런저런 것을 떠나서 같은 농구인으로서 존경스럽게 생각하고 있어요”

권혜미의 재능이 진짜였다는 것은 이른 프로 은퇴후 수원대 시절만 봐도 알 수 있다. 부상과 심적인 부담감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그녀는 즐기듯이 농구를 했고 그 결과 제1회 세계영우먼선수권, 2003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등에 대표선수로 나서서 활약을 펼쳤다. 2006 농구대잔치, 2007 춘계대학농구, 2007 MBC배에서 MVP를 수상하기도 했다.

현재는 누구보다도 농구를 더 좋아한다는 남편을 도와 농구교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있는 권혜미 코치를 만나 지난 날의 아쉬웠던 기억들과 아련한 추억을 돌아보았다. 필자가 권혜미의 애칭으로 쓴 '릴리 오브 더 밸리'는 은방울 꽃의 일종으로 특유의 은은한 향을 통해 향수의 재료로도 사랑받고 있는데 꽃말은 '행복으로의 귀환', '다시 찾은 행복', '틀림없이 행복해질거야' 등이다.

“농구에 대한 애정은 저보다 남편이 더 높은 듯 싶어요”

Q.농구 교실을 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아, 운영자는 남편이고요. 저는 코치로 도와주고 있습니다. 농구 선수가 아닌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어서 거기까지는 성공했는데(웃음), 아이러니하게도 남편이 어지간한 농구 선수 출신보다 더 농구를 좋아해요. 총각 때부터 동호회 등에서 농구를 즐기고 워낙 관심이 많았어요. 지금도 바쁜 와중에 하루의 마지막을 각종 농구 기사를 보면서 마칠 정도니까요. 스티즈라고 혹시 아실까요? 운동복 브랜드인데요. 지난해까지 안양 KGC 후원사였고 올해부터는 대구 한국가스공사를 후원하고 있어요. 남편이 거기 대표인데 예전부터 아이들 가르키는 농구 교실을 무척 하고싶어했고, 그러다보니 저도 옆에서 돕게 됐습니다. 사실 저같은 경우는 은퇴하고 농구 쪽에 일부러 관심을 두지않은 시절도 꽤 길어요. 하지만 남편은 선수만 아니었을 뿐이지 어린 시절부터 한결같이 농구를 좋아하고 즐기는 등 정말 찐팬이에요.

Q.아내가 농구선수 출신이라는 점도 남편 분이 호감을 느꼈던 요인으로 작용했을까요?

하하핫…, 그랬을까요.(웃음) 큰 영향은 없더라도 나쁘지는 않았겠죠. 사실 농구를 좋아하는 남성 분들이 여자 농구선수 출신을 만나기는 쉽지않잖아요. 이성으로 사귄다는게 아니라 알고지낸다는 것 자체가요. 아무래도 생활하고 지내온 환경이 다르니까 알 수 있는 계기가 드문거죠. 지금도 주변에서 신기해하는 듯 싶더라고요. 어쨌든 인연이 되어서 서로 알게됐고 결혼한지는 이제 횟수로 4년째 되었습니다.

Q.어떻게 만나게 된거죠?

정말 우연이었어요. 저같은 경우 선수시절에 대한 아쉬움이 많고 이후 나름 바쁘게 살아왔던지라 농구는 정말 끊고 살아가고 있었거든요. 물론 저뿐 아니라도 현장에서 지도자나 해설위원 등 관련된 일을 하지 않는 이상 이어가기는 힘들겠지만요. 언젠가 시간이 많이 흘러서 (김)은혜, (방)지윤이 등 예전 청소년대표팀 친구들을 만난 적이 있어요. 다들 여러 학교에서 온 친구들이기는 하지만 저희끼리는 나름 동창같은 느낌이었어요. 학창시절 농구만 해왔던지라 일반 학생들과는 친해질 기회가 거의 없어서 아무래도 함께 농구를 하며 당시를 보낸 친구들이 더 친숙할 수밖에 없죠. 저희끼리 오랜만에 만나서 농구 얘기를 하다가 ‘그럼 오랜만에 경기 한번 뛰어볼까?’ 그렇게 이야기가 됐습니다. 하지만 바로 뛸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잠시 고민하고 있는데 한 친구가 남자 동호인 팀을 알고있다면서 그곳에 가서 경기를 하면 어떨까 제의를 하더라고요.

Q.아…, 그곳에서 만나게된거군요?

맞아요. 그곳에 있던 동호인 분들중 남편이 있었고 마침 나이도 같고 그래서 금세 편해지게 됐어요. 만나자마자 서로 운명처럼 통해서 호감을 가지게 되고 그런 것은 아니었고요. 안면 익히고 오다가다 마주치면 아는체하고 그정도였죠. 그때는 다들 미혼이었던 시절이라 누가 누구를 밀어주고 막 그런 분위기도 아니었고요. 이후 시간이 흘러서 친숙해졌고 어떻게하다보니 결혼까지 오게됐네요.(웃음) 영화같은 내용은 아니고요. 생활스토리라고 해야될 듯 싶네요. 현재는 23개월 왕자님 열심히 키우고 있습니다.

“교복의 하얀 스타킹이 싫어서 농구공을 잡게되었습니다”

Q.이력을 보니 요가, 필라테스, 피트니스 등이 눈에 띄더라고요?

아무래도 프로에 진출한 동기들중 빨리 그만둔 케이스에 속하는지라 인생 2막에 대해서도 일찌감치 생각하게 됐어요. 그러다보니 농구같은 팀 스포츠는 아니지만 몸을 쓰는 분야에 대해서 관심이 갔고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거죠. 10년 정도는 정말 매진했어요. 요가공부하러 독일까지 갔고 나름대로 열정적으로 임했습니다. 퍼스널 트레이너도 하고 강사도 하면서 오랜시간을 보냈죠. 지금이야 선수들의 은퇴후 행보에 대해서 많은 정보가 있고 팀에서도 도와준다고 하더라고요. 당시에는 그런 시스템이 지금같지는 않았죠. 농구로 학창 시절을 보내고 프로에서까지 뛰었던지라 농구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잖아요. 그냥 가정 주부가 되던가 아님 어떻게든 농구 관련된 일 쪽으로 가는게 최선이었죠. 저도 처음에는 먹먹했는데 비교적 빨리 주위를 둘러보고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해요. 사실 방향만 잘잡으면 못할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농구로 프로까지 왔을 정도의 근성이면 뭘해도 독하게 하거든요.(웃음)

Q.농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다른 친구들같은 경우 스카우트 얘기도 많고 그런데 저는 오로지 제가 하고싶어서 농구공을 잡은 케이스에요. 아무도 저한테 농구하라고 안했는데 제가 그냥 한거죠. 부모님이 초등학교때 선일초등학교로 저를 전학보내셨어요.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사립으로 보내신거죠. 그렇게 저의 선일초중고가 이어지게 됩니다. 당시 저는 교복을 입고 다니는게 정말 마음에 들지않았어요. 특히 하얀색 스타킹을 신는게 왜 그렇게 싫었는지…, 그런던 어느날 한친구가 사복을 입고 다니는거에요. 그 모습이 교복을 싫어하던 어린 소녀의 마음에 불을 질렀죠.(웃음) ‘너는 왜 교복을 안입고 다녀?’라고 물었더니 자신은 농구부라는거에요. 갑자기 확 샘이나더라고요. 그전까지 농구가 뭐하는 운동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는데 단순히 교복을 안입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관심이 가게된거죠.

Q.그래서 농구부를 찾아갔나요?

갔죠. 그리고 바로 퇴짜맞았죠. 일단 농구는 기본적인 신장부터 되어야하는데 저는 너무 작고 평범했거든요. 거기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께서는 제가 농구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셔서 학교측에 ‘농구시킬 생각없습니다’라고 연락까지 주셔서 못을 받아놓으셨죠. 지금이야 선수들 모집조차 힘들다고 하는데 그 시절에는 선수 수급이 상대적으로 수월했어요.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일단 시켜볼 수가 있었으니까요. 대표적인 시스템중에 장신자 테스트라는게 있었거든요. 예를 들어 은평구라고 하면 해당 지역 학교에 있는 키 얼마 이상 선수가 특정 날짜에 모두 모이게되요. 많으면 수백명씩 되죠. 그중에서 1차, 2차, 3차를 거쳐 최종적으로 8인을 가리게되요. 일단 제가 있던 당시는 그랬어요. 어쨌거나 저는 농구가 하고싶은 마음에 열심히 쫓아다녔지만 테스트를 볼 기회 자체를 안주더라고요.

Q.어, 그러면 방법이 없는거잖아요?

그랬죠. 나름 오기반 열정반으로 따라다녔지만 기회 자체를 받을 수 없으니 내심 낙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무슨일 때문에 교무실에 왔는데 거기서 농구부 테스트에 합격한 최종 8인에게 유니폼을 맞춰서 주더라고요. 힐끔힐끔 쳐다보고있는데 너무 부러웠어요. 헌데, 여기서 변수가 발생했습니다. 등번호 22번 친구가 갑자기 농구를 안하겠다고해서 결원이 생겨버린거죠. 이미 유니폼까지 맞췄는데요. 그러다가 선생님이 저를 쳐다보시더니, ‘그렇게 하고싶냐? 그럼 이것 네가 입어라’하고 남는 유니폼을 주시더라고요. 이른바 꿩대신 닭이었죠. 사실 지금생각해보면 특별히 기회를 주시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유니폼이 남으니까, 정말 간절하게 따라다녔던 제가 한번 입어보라는 의미였던 듯 싶어요. 당시에는 농구부원이 되면 바로 짧게 커트를 했거든요. 하지만 그때 농구부 사진 속에서는 저만 머리가 길어요. 얼떨결에 뒤늦게 들어가게 됐고 선생님도 ‘잠깐 고집 피우다가 말겠지’ 그런 생각이셨나봐요. 그때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어요.

Q.어렵게 들어가기는 했는데 막상 경험해보니 ‘어?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은 들지않으셨나요?

아, 무슨 말씀하시려는지 알 것같아요.(웃음) 아무래도 초등학생들인지라 들어갔다가 힘들면 바로 그만둘 친구도 적지않을거에요. 그래서 4학년 때는 운동을 거의 안시켜요. 얼음땡도 하면서 그냥 농구공 잡고 알아서 놀게하는 경우가 많아요. 5~6학년 언니들 연습하는 것 구경하게 하고요. 그렇게 1년을 보내다보면 다들 자연스럽게 장래희망이 농구 선수가 되어있죠. 농구가 당연히 해야 되는 것으로 인식되는 거에요. 그때부터 드리블 연습도 하고 기초 훈련을 하면서 적응을 시켜나가요. 예전이기는 하지만 어린 학생들의 성향을 어른들이 제대로 알고 있었던 것이죠.

Q.그 이전 세대는 더 그랬겠지만 1980년대생들도 나름 엄한 환경에서 운동을 했더라고요.

엄했죠. 분위기나 환경 자체가 일반 학생들은 상상하기 힘든 수준이었어요. 한 학년 선배라고해도 마주치면 90도로 인사하는 등 기본적으로 선후배 관계가 엄격했죠. 등교시에도 어머니에게는 ‘잘가’그러고 편하게 하다가도 앞에 선배 언니가 계시면 부리나케 뛰어가서 큰 목소리로 인사하고 그랬죠. 지금이야 체벌같은 것이 거의 없어졌지만 당시에는 상당수 존재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저희 학교도 있기는 했지만 정도가 약했습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저희 학교 체육관으로 다른 학교 농구부가 연습게임을 오면 정말 강하게 체벌을 당하는 것을 심심치않게 봤거든요. 그걸보면서 저희가 다 긴장을 했을 정도니까요. 더불어 ‘우리학교가 그래도 낫구나’하는 애교심까지 들고는 했죠.(웃음)

“고등학교 시절 몸을 제대로 만들지 못했던 부분이 후회스럽습니다”

Q.농구는 적성에 잘맞았나요?

적성에 맞았다기보다는…, 점점 욕심이 커졌지 않나 싶어요. 마지막에 어머니께서 어쩔 수 없이 허락하신 것도 나름 이유가 있었어요. 저같은 경우 공부도 그렇고 알아서 잘하는 스타일이면서도 아니다 싶은 것에는 싫증을 잘 느끼거든요. 학원도 그랬었고요. 그래서 어머니 생각에는 ‘저러다가 그만두겠지’싶으셨을거에요. 하지만 하다보니 더 잘하고 싶은 생각도 들고, 선생님께서도 잘 가르쳐주셔서 실력이 점점 늘더라고요. 그렇게 되다보니 욕심이 계속 생겨난거죠.

Q.포지션은 어떻게 되었나요?

그 시절에는 딱히 포지션을 정확히 구분지어서 플레이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냥 가드, 포워드, 센터 정도였는데 저는 앞선에서 뛰었으니까 가드였겠죠. 팀에서는 주 득점원을 맡았고요. 한창 잘했던 중학교 시절까지 돌아보면 슛이 엄청 좋다거나 탄력이 굉장하거나 그런 유형은 아니었고요. 그냥 이것저것 두루두루 잘하는 키작은 아이? 선생님이 가르쳐주는데로 잘 따라하는 아이? 그랬지않나싶어요.

Q.앞서 언급한데로 또래 중에서 그렇게 잘했는데 고등학교 들어가서 평가가 확 떨어졌어요.

일단 제가 더 노력하고 실력을 향상 시키지못한 이유가 가장 컸겠죠. 어쨌든 운동 선수에게는 스스로 자신의 실력을 향상시킬 책임이 있으니까요. 그 외…, 말을 조금 보태자면 학교의 사정도 있었어요. 중학교 때까지는 저희 학교가 정말 잘나갔거든요. 그러다가 고등학교로 올라가려던 시점에서 IMF가 터졌어요. 여러 가지로 상황이 나빠지면서 선수 숫자가 확 줄어버렸고 더불어 팀 전력도 급락했죠. 어떤 팀에서 뛰느냐도 선수 기량 향상에 큰 영향을 끼치거든요. 제가 농구를 시작할 때 동기만 8명으로 시작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당시 고등학교까지 농구선수로 올라간 케이스는 저 포함해서 3명밖에 안됐습니다. 다들 포기한거죠. 훈련도 제대로 치를수 없었고 그로인해 운동량도 떨어지고 기량이 정체되어버렸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프로까지 간 배경에는 초등학교때 배운 농구 실력으로 갔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만큼 이후 성장이 멈추다시피 한거죠.

Q.운동량이 부족했다는 것에 대한 설명을 좀 더 들어 볼 수 있을까요?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농구공을 잡고 쭉 주전으로 뛰었거든요. 벤치에서 있어본 기억이 거의 없어요. 그러다보니 공격을 이끌어가는 위치에서 늘 플레이했고 본의아니게 수비 등을 등한시하게 됐죠. 평소 운동량이 부족해서 수비할 체력까지도 되지않았고요. 차라리 차근차근 체력부터 만들어갔으면 어땠을까 싶기도해요. 기술적인 부분은 고등학교에 와서 닦아도 늦지않거든요. 전 반대로 간거죠. 고등학교 시절에는 선수층도 얇다보니 에이스롤을 맡았는데 아파서 몸이 좋지못하면 선생님이 오셔서 대회 출전 여부를 물어볼 정도였습니다. 일단 선수가 너무 없다보니 제대로된 훈련이 안됐어요. 2~3학년때는 인원수가 5~6명에 불과했으니까 말다했죠. 전력을 떠나 대회를 나가려면 최소한의 선수가 필요했던지라 대회 일정이 잡히면 농구를 그만둔 멤버한테까지 제가 직접 찾아가서 참여만해달라고 부탁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닙니다.

Q.자신보다 못했던 선수들이 고등학교 때 치고 나가던 것이 속상하지 않으셨을까요?

아무래도 사람인이상 그런 마음이 안들 수는 없죠. 특히 운동 선수들은 누구하나 할 것 없이 특유의 승부욕이라는게 있잖아요. 개인적인 기량 정체도 아쉽고 팀도 승리보다는 패배에 익숙해져가는게 슬펐습니다. 중학교 때까지는 정말 이기는게 너무 당연하다고 여기고 농구를 해왔거든요. 초등학교 6학년 때는 그해 딱 한번 졌고 중3 때도 그랬습니다. 거의 전승에 가까웠죠. 그렇게 농구를 해오다가 고등학교 시절 동네북이 되어버리니까 멘탈에 금이 쩍쩍 가버렸습니다. 더불어 중학교때까지는 저보다 못한 친구들이 고등학교에서 잘 나가게되면 속이 상하면서도 나중에는 인정하게 되더라고요. 일단 잦은 승리를 통해 상승세를 타기도 하고, 더불어 경기중 몸을 부딪히다보면 알 수 있거든요. ‘정말 운동 많이했구나’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Q.전학 등은 생각하지 않으셨을까요?

지금이야 전학 등이 비교적 자유롭지만 당시에는 쉽지않았죠. 인식 자체도 연고가 있으면 그 라인타고 올라가는게 당연하다고 여겼거든요. 전학을 통해 더 강한 학교로 가서 훈련도 많이하고 팀 성적도 챙겨야 되겠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던 것 같아요. 더불어 고등학교 때 역시 올라가자마자 주전으로 뛰었으니까 전학을 가고싶다고해서 보내줬을까 싶어요. 팀에서도 배신자 취급을 받았을 것이고요.

Q.그런 경험이 지금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많은 참고가 될 듯 싶어요.

그것은 약간 달라요. 제가 (방)지윤이나 (김)은혜처럼 엘리트 선수들을 직접 가르치거나 가까이 있으면 그런 부분을 신경썼겠지만 현재 하고 있는 것은 농구교실이잖아요. 대회를 나가서 성적을 내고 프로에 진출시켜야겠다는 것이 목표가 아닌 아이들이 농구를 즐겁게 여기도록 하는 부분이 먼저인지라 색깔이 다르다고 할 수 있죠.

“짧은 프로 생활이지만 많은 것을 느끼고 경험했습니다”

Q.암울한 고등학교 시절에도 불구하고 프로무대에 5순위로 뽑혔어요?

청소년대표로 선발되어 나갔던 당시에 드래프트가 열렸는데 팀 성적은 좋지않았지만 그런데로 제 가능성은 인정해 주셨던 것 같아요. 사실 저는 프로보다는 대학을 가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주변에서 반대를 했고 특히 부모님께서는 ‘말도 안된다’고 하셔서 프로행을 결정하게 됐죠. 고등학교때 팀 성적도 좋지 못했던지라 1라운드에 지명될 것으로는 기대를 안했어요. 2라운드정도에 뽑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만했었죠. 그러다가 예상보다 높은 순위에 뽑혔고 저 자신도 조금 어리둥절했던 기억이 나요. 이전 중학교 시절의 모습까지 한꺼번에 보시고 가능성에 높은 점수를 준 듯 싶어요.

Q.왜 그렇게 프로생활을 짧게 마무리지었나요?

고등학교 때 훈련량이 부족한 것도 문제지만 중학교 때부터 거의 스타팅으로 뛰었던 부분도 원인이 됐어요. 몸을 돌아볼 사이도 없이 과도하게 많이 뛰었다고나 할까요. 그러다보니 현대 하이페리온에 입단하기 무섭게 디스크가 터지고 말았어요. 팀 트레이너와 함께 병원을 찾았는데 당시 허리 상태가 ‘일반인의 20%정도 밖에 기능을 못한다’고 진단이 나왔어요. 그러다보니 제대로 훈련을 할 수가 없어서 쉬는 시간이 많아졌고, 고등학교때 운동량이 부족한 것까지 더해지면서 훈련 체력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갓 데뷔한 루키로서 정말 치명적이었죠. 프로팀의 훈련 자체를 따라갈 수가 없었으니까요. 공격이야 그전에 해왔던 식으로 어느 정도 할 수 있었으나 문제는 수비였어요. 수비센스나 요령 그런 것은 둘째치고 상대를 끊임없이 따라다니면서 압박하고 이리저리 뛰어다녀야되는데 그럴 몸이 되지않았던 거죠.

Q.막내로서 팀에 눈치도 보이고 그랬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요. 감독님도 너무 무섭고 선배 언니들도 어려웠던 시절이니까요. 루키로서 아프다고 골골대던 상황에서 더더욱 그랬죠. 감독님이 자주 바뀌신 것도 저로서는 혼란스러웠습니다. 제가 팀에 있던 기간이 2년 남짓인데 그 기간동안 감독님이 무려 4번이나 바뀌셨어요. 산전수전 다겪은 언니들이야 내공이 있으니까 분위기 맞춰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겠지만 저는 참 힘들더라고요. 지금도 기억나는게 스트레칭을 하러 걸어가는데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라고요. 흐느껴 우는 것도 아니고 그냥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괜찮다 괜찮다 스스로 힘껏 멘탈을 부여잡으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마음 속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죠. 누가 특별히 힘들게해서 그렇다기보다는 제가 처한 상황 자체가 답이 안나왔던지라 두려움, 불안감, 짜증 등 여러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뒤엉켰던 듯 싶어요.

Q.허리 디스크도 터졌던 상황이라 쉬어야되지 않았을까요?

이게 참 애매해요. 고참급 언니들이 주도해서 훈련을 할 때도 있는데 막내가 한쪽에서 쉬고있는 것도 그림이 이상하잖아요. 사람에 따라서는 ‘나도 허리 아파봤는데 너무 유난떠는 것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얼마나 아픈지 데이터로 기록해서 보여줄수도 없고 꾀부리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었다고봐요. 무엇보다 언니들 열심히 훈련하는데 쳐다만 보고 있는다는 자체가 너무 힘든 일이었죠. 그것을 배려해서 당시 감독님이 저를 집으로 보내셨어요. 어차피 그 상태로 팀에 있는 것은 의미가 없는지라 기한을 정해줄테니 제대로 쉬고오라고 하신 것이죠. 너무 허리가 안좋아져서 집으로 가는데 제대로 걷지를 못하겠더라고요. 집에 다와서는 정말로 기어서 들어갔어요. 어쩄거나 지금 생각해도 고마운 일이지만 문제는 그 짧은 기간동안 감독님이 또 다시 바뀌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Q.난감했겠네요. 감독들마다 성향이 다르잖아요.

맞아요. 훈련도 훈련이지만 막내다보니까 빨래도 하고 이것저것 잡다한 일거리가 있잖아요. 쉬어도 쉬는게 아닌거죠. 그런 사정을 잘 알고 계셨던 감독님이 한달 정도 휴식 기간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새로이 바뀌신 감독님은 생각이 다르셨어요. 쉬어도 팀에 들어와서 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팀에 들어갔는데 달라진 것은 없게 되는 것이죠.

“하늘이 준 선물인 아기를 잘키우는게 0순위 목표입니다”

Q.제대로 걷지도 못했을 정도면 운동이 문제가 아니라 일상 생활부터 걱정해야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랬습니다. 일상 생활은 재활로 충분히 가능하지만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싶으면 수술을 해야한다고 하더라고요. 당시는 의학 기술이 지금과 달라서 허리 수술을 한다는 것은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거든요. 가족들 또한 이제 20대 초반인데 허리에 칼을 대는 것은 아니다고 수술을 안했으면 좋겠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팀내 주요전력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었고요. 당시 제 포지션이 1번이었는데 그 자리에는 전주원 언니가 있었어요. 거기에 김영옥 언니, 정윤숙 언니, 권은정 언니, 진미정 언니, 박명애 언니 등 멤버가 정말 화려했습니다. 몸이 건강하다해도 뚫고 들어가기가 매우 어려웠겠죠.

Q.하지만 은퇴후 수원대에 가서는 또 펄펄 날아다녔어요?

하하핫…, 아무래도 프로와 아마의 차이도 있고요. 부담없이 편하게 뛸 수 있었던 환경이 조성된 부분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은퇴했을 당시 수능도 끝났던 시기인지라 1년 정도 준비해서 다음 해에 대학을 들어가려고 했는데 마침 수원대 박재영 교수님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박교수님같은 경우 제가 초등학교때 농구해설을 하셨던 경력도 가지고 계셨는데 그시절 저를 좋게 기억하고 계시더라고요. 당시는 농구에 대해 미련이 없던 상태인지라 학장님과 교수님을 찾아 뵙고 솔직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분께서 권유를 해주셨고 저도 마음이 움직여서 수원대 행을 결심하게 되었죠.

Q.요가, 필라테스를 한 배경에는 허리 문제도 있었을까요?

전혀요. 제가 은퇴하고도 재활을 꽤 오래했어요. 한 3년 정도했는데 그때 허리는 사실상 완치되었습니다. 요가, 필라테스 등은 제2의 꿈을 찾아가는 과정이었을뿐이고요.

Q.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되실까요?

지금은 엄마로서의 제가 가장 중요하겠죠. 제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한 것중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게 아이를 낳은 일 같아요. 이렇게 귀여운 아기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했다는게 정말 내가 한일인가 지금도 깜짝 깜짝 놀란다니까요.(웃음) 아이가 생기면 인생을 바라보는 눈도 바뀌고 모든게 달라진다고 하던데 정말 그 말이 딱 맞는 듯 싶습니다. 엄마로서 아이를 잘 키워내는게 가장 큰일일 듯 싶어요. 저희 남편같은 경우 아이를 지켜보고 있으면 ‘기분좋은 부스터가 달린 느낌’이라는 표현을 쓰더라고요. 본인의 분신이 생김으로해서 한 발 더 뛰게하는 원동력이 만들어진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요. 아이는 하늘이 준 선물이라는 말이 정말 맞는 것 같아요. 더불어 뜻하지않게 농구공을 다시 잡게 됐는데, 농구 교실의 성격을 잘 살려 아이들이 행복한 마음으로 즐길 수 있도록 잘 이끌어줘야겠죠.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기사제공 점프볼

김종수 oete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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