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조할머니가 육아, 할머니가 생계를 책임지셨습니다”
기사입력 2023.03.14. 오전 10:01 최종수정 2023.03.14. 오전 10:01
[김종수의 농구人터뷰(73)] '파랑새' 주희정
“너 뭐야? 여긴 왜 왔어?”
“그, 그냥 오라고해서…, 왔을뿐인데요”
KBL 역사의 한페이지에 이름을 올린 레전드 포인트가드 주희정(46‧181cm)이 초등학교 시절 농구와 처음 인연을 맺게되면서 당시 농구부 감독과 나눈 대화(?)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다른 초등학교로 전학오게된 꼬마 주희정은 낯선 환경에 적응할새도 없이 첫날부터 앞자리에 앉아 짝과 장난을 치면서 수다 삼매경에 빠졌다.
“정신사납게 보는데서 떠들지말고 저기 맨 뒤로 가서 떠들던지 자던지 알아서해” 어이가 없어진 선생님이 맨 뒷자리로 옮겨가라고 지시했고 주희정은 뻘쭘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자리를 옮겼다. 맨뒤로 가자 갑자기 시야가 확 좁아졌다. 당시 반에서 가장 작은 축에 속할 정도로 왜소했는데 훨씬 큰 친구들에 가려 칠판 쪽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게 뒷자리에서 뻘쭘하게 앉아있는데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교실로 들어왔다. 굉장히 키가 큰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자신을 농구부 감독이라고 소개했고 대뜸 “거기 맨 뒷줄에 앉은 녀석들, 점심먹고 모두 강당으로 와”라고 지시했다. 무슨 일인지 파악할 틈도 없었다. 선생님 말씀이 법같이 여겨졌던 시대인지라 점심식사를 마치기 무섭게 우르르 강당으로 몰려갔고 주희정도 거기에 끼어있었다.
각반 학생들이 강당에 모이자 농구부 감독은 고개를 돌려 하나둘 유심히 쳐다봤다. 그리고는 주희정 차례에 와서는 시선이 딱 멈춰버렸다. 키 큰 친구들 사이에서 유달리 작은 체격이 눈에 확 띄었기 때문이다.
감독은 ‘왜 왔냐?’고 물었고 주희정은 ‘오라고해서 왔을 뿐이다’고 대답했다. 얼떨결에 키 큰 무리에 끼게 된 주희정은 본래부터 뛰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던지라 달리기 등에서 발군의 기량을 보였고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농구부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주희정은 기록의 사나이로 불린다. 정규리그 통산 1,029경기(1위)를 뛰며 8,564득점(5위), 3점슛 1,152개(2위), 3,439리바운드(5위), 5,381어시스트(1위), 1,505스틸(1위)을 기록했다. 특급 포인트가드로서 워낙 오랜 시간을 활약했던지라 어시스트, 스틸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리바운드 순위는 포지션을 감안했을 때 놀라울 정도이며 3점슛 또한 한때는 약점으로 지적된 부분이라는 점에서 여러모로 의미심장하다.
수상기록도 화려하다. KBL 초대 신인왕을 필두로 우승(1회), 정규시즌 MVP(1회), 챔피언결정전 MVP(1회), 어시스트상(4회), 베스트5(4회), 수비 5걸(3회), 모범선수상(2회), 식스맨상(1회) 등 본인의 포지션에서 받을 수 있는 상은 대부분 1회 이상 차지했다. 에너지 넘치는 플레이 스타일 때문에 ‘KBL의 제이슨 키드’로 불렸지만 꾸준함과 수상기록을 놓고보면 존 스탁턴도 연상된다.
워낙 인기가 많았던 선수답게 주희정에게는 ‘주키드’, ‘테크노가드’, ‘썬가드’, ‘바람의 아들’ 등 다양한 별명이 있었다. 하지만 기자는 그와의 인터뷰가 끝난 이후 ‘파랑새’로 쓰기로 했다. 연습생 신화를 만들었던 나래 시절 ‘아기 파랑새’라는 별명을 언론에서 붙여줬는데 거기에서 이제는 나이가 있으니 아기라는 말을 빼고 파랑새라는 단어만 가져왔다.
그는 힘든 환경 속에서도 의지를 잃지않았고 자신이 인생을 건 농구에서 성공을 거뒀다. 자기관리에 엄격한 성격이면서도 내 사람들은 살뜰히 잘 챙기고 무엇보다 밝고 긍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인터뷰내내 선수나 감독 주희정보다는 인간 주희정이 더 마음에 들어왔기에 파랑새보다 더 어울리는 별명은 없을 듯 싶었다. ‘농구人터뷰’에서도 주희정의 이런 인간적인 모습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까한다.
“농구보다 아빠로서의 삶이 더 어렵습니다”
Q.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언제나 그랬듯이 제 일상은 되게 단순합니다. 집 그리고 체육관이죠. 집을 나서면 머릿속에는 온통 고려대 농구부 생각뿐인데 다행히 선수들이 잘해줘서 지난해 전관왕도 했고 잠깐의 휴식기 이후 다시 시즌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목표를 달성하는 것도 어렵지만 이룬 목표를 지키는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선수들과 함께 고려대의 명성을 계속해서 유지하게 만드는 것이 감독으로서의 제 책무가 아닐까 싶습니다.
Q.역시나 농구 밖에 모르는 이미지는 그대로네요. 골프를 친다던가 다른 취미 활동은 없을까요?
하하핫…, 제가 좀 재미없는 남자입니다. 어린시절부터 농구에 목숨을 걸고살아서 농구 외에는 딱히 관심이 가질 않네요. 사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일이나 취미 관심사 등을 1부터 10까지 나열해보면 전부 농구라고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골프같은 것도 칠줄 모르고요. 어떤 분들은 두루두루 잡기에도 능하시던데 저는 그런 쪽에 관심도 재주도 없습니다. 그나마 취미라고하면 남는 시간에 NBA나 유로농구 시청하는 것인데…, 아! 결국 이것도 농구네요.(웃음)
Q.자녀가 많아보이더라고요. 아무래도 외롭게 자라서 일부러 자녀를 많이 가지신 이유도 있을까요?
아니요. 전혀 관련없습니다. 현재 딸 셋에 아들하나인데 막내가 아들‧딸 쌍둥이에요. 어쩌다보니 넷씩이나 가지게 됐는데 제가 좀 외롭게 자라서 일부러 자녀를 많이 가져야 되겠다 그런 생각은 따로 하지않았습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네요. 물론 어릴 때 외로웠던지라 편안한 가정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늘 했었고 현재는 너무 행복합니다. 제가 선수 생활을 오래한 편이라 나이에 비해서 사회에 나온지는 얼마되지 않았어요. 사회 생활이라는게 나이가 많다고 잘하는 것도 아니고 얼마나 겪었느냐가 중요한 듯 싶어요. 아직은 초년병이라 이것저것 배워나가고 있죠. 선수로서의 삶과 지도자로서의 삶은 많은 면에서 다르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아빠로서의 역할같아요. 나름대로는 잘하려고하지만 여전히 서툰 부분도 많고 본의아니게 시간도 많이 내지못해서 늘 미안한 마음이 큽니다. 현재 큰딸이 고등학교 3학년이에요. 결혼하고 몇 년 있다가 태어났어요. 제가 25살 때 결혼했으니까 바로 낳았으면 (박)무빈 나이였을텐니까 현재 대학교 졸업반 일수도 있겠네요.
Q.요새 농구인 2세들이 화제던데 혹시 농구를 하고있는 자녀는 있나요?
부끄럽지만 아들이 중학교 1학년인데 현재 농구를 하고 있습니다. 아는 사람들은 알지만 모르는 사람도 많아요. 제가 구태여 잘 알리지도 않고요. 솔직히 말하면 저는 아직도 말릴 수 있으면 말리고 싶어요. 직접 그 길을 가본 사람으로서 얼마나 힘든지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요. 공부를 못하는 것도 아니에요. 과외 한번 시킨적 없음에도 곧잘 하더라고요. 제 마음같아서는 공부를 좀 더 파고들면 어떨까 싶지만 현재는 워낙 본인의 의지가 완강하네요. 평소 성격은 순한데 승부욕 만큼은 상당하더라고요. 선수 시절 저를 닮은 것 같기도하고…,(웃음) 질문주신데로 농구인 2세가 화제이기는한데 정작 부모만큼 잘된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잖아요. 오히려 반대의 경우가 훨씬 많죠. 때문에 조심스럽기도하고 무엇보다 부담을 주고싶지않아요. 본인이 그길 밖에 없다고하면 자식이기는 부모없다고 끝까지 반대는 못하겠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깊이 관여하기보다는 조용히 시켜보고 싶어요. 농구인 2세들이 좋은 점도 있지만 불편한 점도 되게 많아요. 특히 필요 이상으로 주변의 시선을 받고 때에 따라서는 부모와 비교도 되잖아요. 아직은 나이가 어린지라 어떤 길을 갈지 장담하기는 어렵지만 본인이 행복한 길로 가는게 최선이겠죠.
Q.아빠를 닮은 승부욕이라면 뭘해도 할 것 같은데요.
휴우…, 그래서 더 걱정입니다. 사실 저도 때로는 필요 이상으로 강한 승부욕이 마음에 들지않을 때가 있거든요. 저같은 경우 경기에서 지면 잠을 잘 자지 못해요.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쉽게 패하는 날은 더더욱 심해지죠. 다음 경기 있을 때까지 머릿속에는 내내 그 생각뿐이고 경기에서 이겨야 속이 풀리죠. 운동선수로서만 보면 그러한 승부욕이 저를 끌어준 원동력이기도 했지만 아빠로서, 남편으로서는 꼭 좋은 것만도 아니더라고요. 은퇴하고나서 아내와 대화하는 시간을 많이 가졌어요. 그러다보니 그런 부분으로 인해서 아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더라고요. 제 눈치도 보게되고 그랬던 듯 싶어요. 아내뿐이겠어요. 아이들도 그랬겠죠. 너무 미안했어요. 하지만 그때 뿐 또 승부의 세계에 몰입하면 이놈의 승부욕이 사람을 휘감네요. 농구에 있어서만큼은 지는 것을 못참는 성격같아요. 앞서도 언급했듯이 아들 녀석이 이런 저의 성향을 많이 닮은 듯 싶은데, 그래서 더 걱정입니다. 물론 워낙 성정이 곧고 성격적인 면에서 아빠보다 나은 구석이 많아서 저하고는 또 다른 것 같기도 한데…, 부모는 어쩔 수 없나봐요.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제 신념을 강요하지는 않습니다”
Q.감독으로서의 주희정은 어떨까요?
피곤하죠.(웃음) 지도자로 있다보니 선수 시절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팀 스포츠 특성상 선수들을 결속시켜야되는 부분도 있지만 시대가 시대이다보니 예전 스타일대로만하면 안되요. 저희 때야 시키면 시키는데로 했지만 요즘 친구들은 하나같이 개성도 강하고 그래서 본인이 이해를 하지못하면 잘 안따르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 부분에 맞춰서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엄하게 하려고하는데 아직은 많이 미숙합니다. 그래도 원칙은 있어요. 아직 기량이 따라오지못해도 열심히하는 친구에 대해서는 좀 더 마음이 가고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려고 하는 편이에요. 농구로 고려대까지 왔다는 것은 기본적인 재능은 갖추고 있다고 보면되요. 어쩔 수 없는 재능의 차이도 존재하지만 누가 더 열심히 간절하게 하느냐에 따라 격차는 줄어들 수 있어요. 다만 감독으로서, 사람으로서 저의 시선으로만 타인을 봐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은 자주 합니다. 제 입으로 이런 말하기는 부끄럽지만 저는 농구에 대해서만큼은 완벽주의자적 성향을 가지고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농구를 시작한이래 늘 그렇게 해왔으니까요. 문제는 너무 그렇게하다보니 가족, 코치, 선수 등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부분도 있는 듯 해서 좀더 소통을 많이하려고 노력중입니다.
Q.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술은 한잔씩 즐기나요?
어우, 저도 가끔은 술을 한잔씩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는데 아쉽게도 전혀 마시질 못합니다. 몸이 받지를 않아요. 그래서 술하고는 친하지 못합니다.(웃음) 대신 가까운 지인들이 부르면 마시지는 못해도 함께 앉아서 얘기나누고 그런 것은 싫어하지 않습니다. 고민이 있으면 들어주고 나름대로 저도 같이 고민하면서 제 생각도 말해주고 그런거죠. 술한잔 마시면서 ‘괜찮아, 괜찮아’하면서 등을 팡팡 두들겨준다기보다는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찾아보려고하는 스타일에 가깝습니다.
Q.지난해 여준석이 갑작스럽게 미국행을 결정하면서 조금 당황스러웠을 듯 싶어요. 전혀 상의가 없었나요?
상의는…, 했죠. 출국 전날밤에 집 앞에 찾아와서 다음날 아침 8시 비행기로 떠난다고 하더라고요. 추일승 국가대표 감독님과 얘기도 끝났다고 하면서요. 살짝 당황한 것도 있었지만 어쩌겠어요. 선수가 더 큰 도전을 위해서 떠난다는데 뜻을 존중해야죠. 좀 더 빨리 의견을 밝히고 상의를 했으면 좋았겠지만 요즘 세대는 저희 때와는 또 다르잖아요. ‘나 때는 안그랬는데, 왜 이렇게 경우가 없지’등의 생각은 안하려고요. 제가 어렸을 때 기준으로만 생각하다가는 요즘 친구들을 이해할 수도 없고 소통도 안될 듯 싶어요. 어쨌거나 간다고 하니까 응원해줘야죠.
Q.여준석의 미국행에 대한 감독님의 개인적인 의견이 궁금합니다.
기본적으로 (여)준석 뿐 아니라 국내 유망주들이 더 큰 무대에 가서 실력 향상을 이루고 농구발전에 이바지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모두가 같을거에요. 다만 방식에서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않을까 싶어요. 이미 준석이는 고려대에 입학할 당시부터 해외진출 얘기가 많이 돌던 선수잖아요. 저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얘기를 해준 적은 있어요. 저같은 경우 나중에 재입학 하기는 했지만 중퇴 출신이거든요. 거기에서 있을 수 있는 아쉬웠던 부분도 얘기해줬어요. 개인적으로 미국에 진출하는 것도 좋지만 일단 KBL에 입성해서 구단에서 서포트를 받으면서 가게되면 좀더 나은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 제 의견을 말해준 적도 있어요. 과거 방성윤 선수도 그런 방식으로 해외에 도전했었잖아요. 준석이는 신체조건 등 다른 부분에서 장점이 많은지라 가능성 또한 더 높지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정답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선택은 본인의 몫이고 준석이가 충분히 생각해서 결정했으리라 믿습니다. 다만 이후에 해외무대에 도전할 선수들에게 하나의 사례가 될 수도 있는지라 그런 부분에서는 다들 신중할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
Q.시대만 잘 만났으면 감독님도 해외진출을 노려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하핫…, 제가 그만한 실력이 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시대에 농구를 했으면 도전 정도는 해봤을 것 같아요. 성공여부를 떠나서 큰 무대에서 잘하는 선수들과 깨지면서 부딪히다보면 성장하는 부분도 있거든요. 사실 저는 현역 시절에도 해외 무대에 대한 꿈은 늘 가지고 있었어요. 꼭 미국이 아니더라도 유럽이든 아니면 중국, 일본, 필리핀 어디라도 가서 다른 환경 속에서 다른 스타일의 농구를 경험하고 싶었던 이유가 큽니다. 중학교 때부터 일본리그를 가고싶다는 생각을 품기도 했었고요. 정말 잘하면 미국 등 큰 무대로 가야겠지만 다른 나라 무대에 가서 뛰어보는 것도 충분히 의미가 있지않을까 싶어요.
Q.은퇴후 해외연수 등도 경험했나요?
아뇨. 선수로 있을 때 해외로 전지훈련을 간적은 있지만 아직 정식으로 연수를 가본 적은 없습니다. 은퇴후 삼성에서 도와줘서 3개월간 필리핀에서 객원코치로 있었던게 전부죠. 그리고 유럽투어를 다녀온 적은 있어요. 유럽리그를 보러다닌 것이죠. 스페인이나 동유럽 쪽을 다니면서 한달내내 오직 농구만봤어요. 독일에 갔을 때는 그곳 명문 밤베르크 팀 감독님을 만나 궁금한 것도 물어보고 이것저것 대화를 나눠보기도 했습니다. 유럽에서의 하루하루가 소중한 자산처럼 느껴지더라고요. 많은 이들이 선호하는 미국도 좋지만 조직농구나 팀워크 등을 배우기에는 유럽도 참 좋을 듯 싶었어요. 더불어 저는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고자하는 성향이 있는데 그런 이유도 조금은 있었고요. 언젠가 시간이 되면 다시 한번 둘러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증조할머니가 육아를, 할머니가 생계를 책임지던 시절이 생생합니다”
Q.할머니 손에서 어렵게 컸다고 들었어요. 부모님 얼굴은 거의 못보신건가요?
어머니는 제가 태어나자마자 한달도 안되서 떠났다고하는데 얼굴은 한번도 보지못했습니다. 예전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저는 집에서 태어난 케이스거든요. 친할머니가 저를 받아주셨다고하는데 이후 쭉 책임지고 키워주셨죠. 아버지는 잊어버릴만하면 한번씩 들리시는 정도였는데 제 기억으로는 처음으로 얼굴을 본게 초등학교 5학년때로 기억되요. 그때 한번 보고 몇년 있다가 한번 보고 그랬죠. 형제도 없었어요. 제가 4대독자라고 하더라고요. 할머니가 고생많으셨죠. 저에게는 할머니가 아빠고 엄마고 형제고 친구였다고보면 맞을 듯 싶어요.
Q.할머니께서 아무리 잘해주셨다해도 부모님의 공백은 있지 않았을까요?
글쎄요. 솔직히 말해서 워낙 할머니에게 많은 사랑을 듬뿍 받았던지라 부모님이 안계셔서 외롭고 힘들다 그런 느낌을 거의 받지않았어요. 농구를 시작하고 나서는 특히 더 그랬죠. 농구에 완전히 빠져서 매진하게 되었으니까요. 제 무의식 속에는 무슨 감정이나 느낌이 남아있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느끼고 기억하는 바로는 공백이 없었습니다. 완전 어릴 때는 할머니가 다 덮어주셨고 커서는 농구가 친구였던지라 커버가 완전히 됐죠. 넉넉한 편은 아니었지만 할머니가 정말 잘해주셨어요. 보통 우리들이 생각하는 할머니 이미지 있잖아요. 정말 끔찍하게 손자를 아껴주셨죠. 어릴 때부터 워낙 개구쟁이였던지라 투정도 엄청 부렸을거에요. 그때는 몰랐지만 돌이켜보면 정말 힘드셨을거에요.
Q.성인이 돼서 아버지와 소통하면서 지낸 것으로 들었는데 미운 감정 그런 것은 없었나요?
할머니가 워낙 잘해주셔서 부모님에 대한 미움 그런 것은 거의 없었어요. 그리고 핏줄이다 보니까 처음에는 어색했어도 아버지로 받아들여지게 되더라고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얼굴을 거의 못보고 살다가 프로에 진출해서 한 1년 정도 전화통화도 자주하고 그렇게 지내다가 얼마 안있어 돌아가셨어요. 그렇게라도 잠깐 추억이라도 만든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아버지 얼굴을 아예 모르는 친구들도 있는데 거기에 비하면 저는 행복한 편이죠.
Q.어머니는 아예 얼굴도 못보고 목소리 한번 못들어본 것인가요?
그렇죠. 어머니도 이후 저를 찾지않으셨고 반대로 저 역시 어머니를 찾아봐야겠다는 행동은 하지않았으니까요. 할머니와 부모님이 비슷한 시기에 모두 돌아가셨는데 그중에서 어머니가 가장 먼저 돌아가셨다고 알고있어요. 어머니, 할머니, 아버지순으로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24살, 25살, 26살이었어요. 제가 프로에서 뛸 때니까 어머니도 혹시 텔레비전 등을 보셨으면 저를 알아보지 않았을까 싶어요. 외모도 그렇고 제가 흔한 이름은 아니니까요.
Q.증조 할머니도 육아에 참여했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아요.
그렇습니다…, 제 성장 스토리가 평범하지는 않죠. 맞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3학년때까지는 증조할머니 손에서 자랐어요. 옥탑방에서 사셨고 저를 먹이고 입혀주시면서 직접적으로 케어해주셨죠. 할머니는 밖에서 돈을 벌면서 생활비를 송금해주셨고요. 할머니가 아빠, 증조 할머니가 엄마 역할을 했다고봐도 무리가 없을 듯 싶네요. 이후 3학년 2학기때 증조할머니가 88세로 돌아가시면서 할머니가 저를 키우는 역할까지 모두 맡게 되었습니다.
Q.할머니가 돈을 벌여야 될 정도로 생활이 빠듯했던 듯 싶은데 증조 할머니까지 돌아가셔서 더 힘드셨겠네요.
그렇죠. 할머니가 온전히 저를 키우게되면서 초등학교도 전학을 가게됐고 마침 거기에 농구부, 육상부, 야구부가 있어서 농구를 시작하게된 계기도 마련 됐죠. 어릴 때잖아요. 전학은 갔지만 별로 어색한 것은 없었던 듯 싶어요. 키가 작아서 맨 앞자리에 앉았는데 첫날부터 옆에 친구랑 막 떠들었고 그걸 본 선생님께서 찡그리시면서 맨 뒷자리로 옮겨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뒤에 앉게되었는데 어떤 키 큰 선생님이 문을 열고 들어왔어요. 자신을 농구부 선생님이라고 밝혔고 맨 뒷자리에 앉은 친구들에게 점심식사 후 강당으로 모이라고 지시했어요. 키큰 친구들을 테스트하려고 그랬던 것인데 마침 제가 거기에 끼어있었던거죠. ‘너는 왜 왔어?’라고 선생님이 물었는데 저도 별로 할말이 없더라고요. ‘오늘 전학을 왔는데 떠들어서 맨 뒷자리로 옮겨갔고 때마침 선생님께서 들어오셔서 뒷자리에 앉은 친구들 강당으로 모이라고해서 오게 됐다’고 있는 그대로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어이가 없으셨는지 웃으시더라고요. 어쨌거나 거기에 모인 인원을 상대로 달리기를 시켰는데 제가 좀 잘달리니까 그제서야 ‘농구 한번 해볼생각있냐?’고 물어오셨던 기억이 납니다.
Q.농구를 한다는 것에 대해 할머니 생각은 어떠셨을까요?
반대하셨습니다. 할머니는 제가 남들처럼 평탄하게 가기를 바라셨습니다. 성공하기를 바라는게 아닌 말 그대로 평범한 사람을 원했던 거죠. 농구를 하는 바람에 무산되기는 했지만 고등학교도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곳으로 보내려고 하셨거든요. 잠깐 과거로 돌아가자면 저희 아버지가 많이 사고뭉치셨나봐요. 학력도 중학교 중퇴이고 자라오면서 이런저런 사고를 좀 치셨데요. 건달 쪽에도 있었고 삼청교육대도 갔다왔다고 하더라고요. 할머니 속을 얼마나 썩였을지 짐작이 가죠. 그래서 할머니는 어머니가 저를 임신했을 때 아들이라면 입양을 보내려고 생각하셨나봐요. 아버지를 닮았으면 혈기왕성한 기질일텐데 잘 성장할 수 있는 환경도 아니고 자칫 비슷해질까봐 걱정하셨던거죠. 그래서 딸이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름도 빛날 희에 바를 정해서 ‘희정’이라고 미리 지어놓으셨어요. 할머니께서 고 박정희 대통령을 무척 좋아했는데 정희라는 이름을 거꾸로 뒤집어서 희정이라고 지은거죠.
Q.입양까지 보내려고 했으면 심각한 상황이었겠네요.
그렇죠. 다른 집은 아들이 안태어나서 난리였지만 저희집에서는 고추로 태어난 것부터 환영받지못했으니까요. 그래서 할머니는 제가 3~5살 시절에 입양을 보내려고 고민을 정말 많이 하셨다라고 하더라고요. 실제로 수녀원에 보냈다가 데려왔다가를 여러번 반복하셨나봐요. 어쨋거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할머니는 저를 키우는 와중에서 튀지않고 평범하게 자라기를 원하고 또 원하셨어요. 자동차 정비 등 기술을 배워서 안정적으로 살기를 바랬던 마음이 크셨던 것이죠. 농구를 계속 반대하셨던 것도 예전에는 운동선수하면 못배우고 무식하고 그런 편견도 적지않았어요. 할머니 역시 그런 부분때문에라도 손자가 운동하는 것이 탐탁치않으셨던거죠. 예전에 잘나갔던 복싱 선수 ‘짱구’ 장정구라고 아실까요? 세계챔피언까지하고 파마머리로 유명했잖아요. 부산 아미동 저희 옆집에 살았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당시 워낙 어려서 기억이 나지않지만요. 당시 장정구 아내 분이 돈을 들고 튀었다느니 그분 주변을 둘러싸고 사건사고가 좀 있었나봐요. 그래서 할머니 머릿속에서 운동선수에 대한 인식이 더 안좋아진 계기도 만들어진 듯 싶더라고요. 복싱 경기 자체는 즐겨보셨지만요.(웃음)
“육성회비 면제, 빵과 우유가 농구를 이어간 힘이었죠”
Q.반대는 하셨어도 어쨌거나 농구는 계속 이어갔어요.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어요. 할머니가 많은 노력은 하셨지만 벌 수 있는 돈의 한계가 있었고 늘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당시 농구부에 들어가면 육성회비를 면제받고 점심때 빵과 우유도 줬거든요. 나름대로는 그걸 가지고 할머니와 딜을 했어요. 어려운 집안형편을 감안했을 때 저 정도면 상당한 조건이었거든요. 할머니께서도 그걸 알기에 반대하시면서도 적극적으로 나서지못한 부분도 있었고요. 사실 저는 어떻게든 농구를 이어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아르바이트를 병행할까도 여러번 생각했었지만 그때마다 할머니가 반대하셨어요. 어설프게 다른 것을 겸하게되면 죽도 밥도 안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거죠. 저역시 그런 현실을 알기에 잠을 덜 자면서까지 열심히 훈련에 매진했고요.
Q.그렇게 농구가 좋았나요?
아니요. 중학교에 올라가고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서 점점 좋아지기는 했지만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어요. 농구부에 들어가서 한달내내 슬램덩크 강백호처럼 기본기만 시키니까 정말 재미가 없고 힘들기만 하더라고요. 하기가 싫어졌어요. 그래서 이후에는 농구부에 안가고 선생님을 피해다녔죠. 하지만 같은 초등학교 내에서 피해다닌다고 피해다닐 수 있나요. 그러던 어느날 선생님과 딱 마주쳤고 농구부를 나가기 싫은 마음에 요구조건을 크게 내걸었어요.
Q.요구조건요?
힘들어서 그만두겠다는 말은 어린 마음에도 자존심이 상해서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집안이 가난해서 빵과 우유 한 개씩으로는 부족합니다. 추가로 하나씩 더 주시면 농구를 하겠습니다’라고 요구조건을 내질렀죠. 어린 마음에 이건 크다. 선생님도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이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오산이었죠. 선생님은 너무도 흔쾌히 바로 그 자리에서 알았다고 하셨고 예상외 반응에 제법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쨌든 그렇게 덜미를 잡혔고 본격적으로 농구를 하게 됐죠. 하지만 생각해보면 육성회비 면제와 빵과 우유라는 메리트 때문에라도 완전히 손을 놓을 수는 없었을 듯 싶어요. 어린시절부터 늘 고생하는 할머니의 짐을 덜어드려야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Q.남들처럼 잘 먹지 못했을 듯 싶은데 그래도 180cm까지는 컸어요.
할머니 덕이 크죠. 넉넉한 살림살이는 아니더라도 손자만큼은 하나라도 더 챙겨먹이려고 애쓰셨습니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가 작은 대포집을 운영하셨어요. 그러다보니 밤이 아침이고 아침이 밤이었거든요. 낮밤에 바꾼 환경에서 자랐어요. 그러다보니 밥은 기본적으로 많이 먹고 닭발, 족발 등 술안주를 주 메뉴로 먹었죠. 그러다보니 뼈도 굵어지고 내구성도 좋아지지않았나싶어요. 증명은 할 수 없지만 어릴 때부터 그렇게 먹어서 그렇지않나 생각합니다(웃음)
Q.플러스로 유전자도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요?
글쎄요. 아버지는 키가 170cm정도 되고 어머니도 160cm가 안됐다고 들었어요. 집안 사람들 중에서도 운동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고요. 저한테 따라붙는 소리중 하나는 체력이 좋다는 것인데 이것도 선천적으로 타고나지는 않고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부분이 커요. 고등학교때 개인훈련을 해도 농구기술 등을 연마한 것이 아닌 납주머니 등을 차고 산을 타는 등 체력보강에 엄청 신경을 썼어요. 언덕을 타고 계단뛰기를 하는 등 그 부분에 공을 들였죠. 저희 어릴 때 많이 듣던 얘기중 ‘체력은 국력이다’는 말이 있잖아요. 체력이 없으면 모든 운동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체력이 있어야지 경기 중에도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거든요. 아무리 똑똑하고 센스가 좋으면 뭐해요. 체력이 떨어져서 헉헉대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 보면 장점을 발휘할 기회 조차 놓치기 일쑤죠. 몸이 지치면 뇌도 함께 지쳐서 상황 판단을 제대로 못하게됩니다. 그래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그런 부분을 강조합니다. 다분히 무조건 체력이 좋아야된다는 것이 아닌 왜 그래야만 되느냐에 대해 설명을 해주는 거죠.
Q.체력의 중요성에 대해서 들었던 말 중 가장 설득력있는 것 같아요.
모든 운동의 기초는 체력이잖아요. 운동선수에게는 경험이라는게 정말 중요하거든요. 단순히 이론적으로 듣는 것보다 직접 몸으로 그런 상황을 겪어보고 다시 지도를 받게되면 받아들여지는 것 자체가 달라져요. 그러기 위해서도 체력은 꼭 필요한 부분이죠. 너무 옛날 사고방식 아니냐고 하실 분들도 계시겠지만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도 기본 바탕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뼈대가 튼튼할수록 더 좋은 것을 입힐 수 있으니까요. 요즘 스킬트레이닝 많이 하잖아요. 저도 이 부분에 대해서 반대 안합니다. 학생들에게도 배우고 싶으면 얼마든지 따로 시간내서 배우고 와라. 단 일반적인 스킬과 5대5농구에서의 스킬은 다르다. 하지만 그것을 체험하는 것도 공부다. 좋은 쪽으로 녹여낼 수 있으면 녹여보라고 말합니다.
Q.운동을 시작하기 전부터 달리기를 잘했다고 하던데 여기에는 당시 환경도 영향이 컸을 듯 싶어요.
맞아요. 예전 분들이 기본체력이 참 좋았다고하던데 상당 부분 맞는 얘기입니다. 저희 어릴때는 어린이들을 위한 놀이시설을 찾아보기가 힘들었잖아요. 기껏해야 어쩌다 한번씩 동네를 찾아오는 이동 회전목마? 그마저도 돈이 있어야 탈 수 있었고요. 그냥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여서 산으로 들로 골목으로 뛰어다니고 놀았죠. 공도 차고 제기도 차고 생각해보면 정말 많은 놀이가 있었던 것 같아요. 학교에 가지않더라도 무조건 아침밥 먹으면 밖으로나가 놀았잖아요. 가끔 텔레비전에서 쿵푸영화 같은 것 해주면 재미있게보고 나가서 친구들끼리 따라하고…, 그러한 가운데 자연적으로 기초체력이 만들어지고 스트레칭도 되지않았나 싶습니다. 저같은 경우 특히 제기를 잘 찼거든요. 농구선수에게는 고관절이 정말 중요한데 제기를 차면서 고관절이 부드러워지고 강해지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종종해요. 더불어 당시에는 정말 부잣집빼고는 대부분 푸세식 화장실을 썼잖아요. 화장지도 부족해서 신문지나 일력가져다가 닦고 그랬죠. 그렇게 푸세식 화장실에 쪼그려서 볼일을 보다보면 골반도 열리고 허벅지로 버티어야 하니 다리도 든튼해지고요. 생각해보면 바로 그 자세가 스트레칭 자세더라고요. 그렇게 생활속에서 많은 운동효과가 발생하지 않았나 싶어요. 물론 입증할 방법은 없지만요.(웃음) 반면 요즘은 영양상태 등은 훨씬 좋아졌음에도 휴대폰이나 게임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친구들이 많아서 당시와는 체력적인 차이가 있지않나싶어요.
“고려대 시절에 저는 선수도 아니었습니다”
Q.고려대를 중퇴하게된 배경에는 어려운 집안 환경 등의 영향이 컸다고 들었습니다.
복합적이죠. 할머니도 아프셨고 집에 돈도 없고 농구에만 전념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대학교 2학년때쯤 농구도 그만두고 학교도 중퇴하고 고향 부산에 내려가서 일이나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떡볶이 장사 등 무엇을 해서라도 일단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죠. 그러던 와중에 프로농구 나래 블루버드 최명룡 감독님, 이재호 코치님께서 저를 좋게 봐주셔서 농구를 계속 할 수 있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저는 선수로 데뷔조차 못하고 농구 인생을 마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아시다시피 당시 제가 고려대 소속이기는 했지만 제 이름조차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었거든요. 저같은 무명 선수에게 그런 인연이라도 있지않았다면 반전의 기회조차 없었겠죠.
Q.당시 생소했던 연습생의 길을 택한 것은 나름 모험이었을 것 같아요.
그렇죠. 남들이 많이 가지 않는 길이고 또 그렇게해서 잘됐다는 케이스도 들어보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대학생이면서도 밤에 슈퍼에 가서 과자나 음료수하나 마음대로 살 수 없는 입장이었으니까요. 가끔 외상을 지기도 했지만 그것도 한두번이지 부끄럽고 미안하더라고요. 친구들을 만나도 밥한끼 살 여력도 안됐던지라 여자친구 만나서 데이트를 하고 그런다는 것은 꿈도 꾸기 힘들었죠. 당시 할머니가 간경화도 오시고 몸이 안좋아지셔서 일을 못하고 계셨어요. 할머니도 걱정되고 이래저래 머릿속이 많이 복잡했어요. 어쨌거나 결론은 돈이었던거죠. 최소한의 돈만있어도 숨을 턱턱조여오는 현실에서 한발이라도 앞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았어요.
Q.금전적인 요인 외에 선수로서의 불투명한 미래도 영향을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맞아요. 경제적으로 힘들어도 미래라도 보였다면 어느 정도 버틸 힘을 가져갈 수 있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고려대에서의 저는 선수도 아니었어요. 후보? 후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울 정도였죠. 1학년 3월 대회 이후에는 경기를 뛰어본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경기는 커녕 제대로 훈련에도 참여를 못했어요. 다들 아시다시피 전희철, 김병철, 양희승, 현주엽, 신기성 등 당시 고려대 멤버들 엄청났잖아요. 박훈근, 박재헌, 박규헌 등 알아주는 선배들이 후보로 뛰던 시절이니까요. 저는 어디에도 낄자리가 없는거에요. 전희철 선배님같은 분들과 제대로된 5대5 훈련도 거의 해본 적이 없어요. 실제로 당시 고려대 멤버들 언급할 때 제 이름 기억하시는 분들 없을걸요. 주희정이라는 선수가 있다는 것도 모르는 분들이 태반일테니까요. 선수로서의 미래를 전혀 볼 수 없는 상황이었죠.
Q.연습생이 되면서 생활이 나아지는 했나요?
확실히 달랐죠. 여전히 미래를 보장할 수는 없었던 상황이었지만 당장 120만원의 월급을 받을수 있다는게 컸습니다. 사실 연습생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연습생은 매우 불안한 위치였습니다. 저 2학년때 같은 학교 3학년 선배도 2명이나 연습생으로 갔고 다른 학교에서도 꽤 많이 있었어요. 각 구단에서 가능성을 보고 데려가기는 했지만 언제든지 잘릴 수도 있는 입장이었고 실제로 성공한 사례도 거의 없다고 보는게 맞아요. 솔직히 아주 재능이 빼어나고 실력이 좋으면 뭐하러 연습생으로 가겠어요. 신인드래프트를 통해 안정적으로 프로에 진출하는게 백번낫죠. 하지만 저는 워낙 가난했던지라 얼마라도 월급을 받아가면서 농구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았습니다.
Q.이전 최명룡 감독 인터뷰때 나온 말인데 연습생 시절 돈도 쓸줄도 모르고 체육관에서 살았다고 하더라고요.
돈을 모아야 되니까요. 제가 구두쇠 스타일은 아니에요. 나름 쓰는 것도 좋아해요. 하지만 당시에는 너무 가난했고 한푼이라도 모아놓아야 미래를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다행히 할머니 빌라 한 채를 사드릴 수 있었고 그 다음 목표는 제 이름으로 된 아파트를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돈을 많이 받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든 안쓰고 모아야 했죠. 당시에는 숙소에서 식사, 간식까지 다 제공되었던지라 시간이 나도 밖에 나갈 이유가 없었어요. 농구를 하면서 공짜로 밥먹고 자고 월급까지 받는다는게 너무 행복하더라고요. 물론 20대 초반 어릴때라 아예 숙소에서만 꽁꽁 틀어박혀있지는 않고 가끔 밖에 나가서 사람들하고 어울리기도 했지만 주로 숙소 생활을 즐겼다고 보는게 맞을 듯 싶어요.
“정통 1번은 보이지 않는 흐름을 읽을줄 알아야된다고 생각합니다”
Q.일찍 결혼을 하셨잖아요. 할머니가 결혼을 그렇게 반대했다고 들었는데 왜 그러셨을까요?
이게 일부에서는 잘못 알려진 것도 있어요. 할머니가 결혼을 반대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세간에서는 제가 아내와 만나는 것을 싫어했다고 아시는 분들도 꽤 계시더라고요. 제 아내와 할머니는 전혀 관련이 없어요. 할머니는 손자가 결혼을 일찍하는 것 자체를 반대하신거죠. 예전 분이시라 점같은 것을 종종 보셨어요. 그러던중 30살 넘어서 결혼을 해야 더 잘풀릴 것이다는 점괘를 받아오셨고 거기에 꽂히신거죠. 어찌보면 순전히 손자를 걱정하는 마음에 그러셨던 것 뿐인데 사실이 왜곡되고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Q.나래에서 신인상도 타고 이름을 알렸는데 삼성으로 트레이드 되면서 적지않게 서운했을 듯 해요.
트레이드라는 것 자체가 매우 드물었고 선수들간 소속팀에 대한 애착도 강했던 시절이었잖아요. 지금이야 트레이드가 되면 손익계산부터 따져보는 선수도 많겠지만 당시에는 트레이드를 버림받는 것에 비교하는 이들도 많았을 정도에요. 저 역시 이제막 나래에서 자리를 잡고 팀의 미래로 불리고 그랬다가 삼성으로 가라고하니까 어안이 벙벙했어요. 당시 김승기, 양경민 선배님하면 아마 때부터 쟁쟁한 분들이셨는데 왜 나같은 사람과 바꾸나 싶은 의아함도 들었고요. 솔직히 당시에는 서운했어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저도 삼성가서 잘됐고 김승기, 양경민 선배님도 나래에서 자리를 잘잡고 활약하셨으니 서로간 윈윈이라고 생각합니다.
Q.성향을 보면 딱 프랜차이즈 스타감인데 어쩌다보니 여러팀을 오가게 됐어요.
그러게요. 하지만 나래에서 삼성으로 갔을 때부터 ‘프로의 세계에서 트레이드는 언제든지 있을 수 있다’고 마음을 고쳐먹었어요. 선수로 뛰다보면 제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도 종종 벌어지잖아요. 그때마다 마음이 흔들리면 프로에서 살아남기 힘들죠. 실제로 저도 이후에 그런 마인드로 선수 생활을 했어요. 삼성에 서장훈 선배님이 왔을 때는 서로 플레이 스타일이 잘 안맞아서 제가 안양으로 트레이드되었고 이후 안양에 있을 때는 우승에 목말랐던 제 의견도 반영되어 SK로 가게 됐죠. 저희 때와 다르게 지금 친구들은 트레이드를 대하는 자세 자체가 다를거에요. 프로라는 이름을 달고 뛰는 이상 원치않는 트레이드가 이뤄져도 비즈니스적인 입장에서 이해할 필요도 있어졌고요.
Q.안양 KT&G 시절이 선수로서의 최전성기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체력은 삼성 시절이 가장 좋았던 듯 싶고요.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안양에 있을 때가 물이 올랐었죠. 제가 속공농구에 강한데 당시 감독님께서 런앤건 스타일로 판을 짜주셔서 마음껏 휘젓고 다녔던 기억이 나네요. 특히 마퀸 챈들러, 캘빈 워너 두 외국인선수와 함께 미친 듯이 달리던 시절은 정말 신이 났었습니다. 당시 저희팀이 신장은 작았지만 정말 무지막지하게 뛰면서 상대팀들이 무척 힘들어 했어요. 한창 잘나가다가 워너가 부상 및 불미스런 일로 전력에서 이탈하면서 브레이크가 걸리고 말았는데 그때 만약 우승을 했더라면 되게 의미깊었을 듯 싶어요. 평균 신장도 높지 않은 팀이 빅맨 외국인선수 없이 우승을 차지하는 사례가 되었을테니까요.
Q.최근에는 정통 포인트가드가 사라져가고 듀얼가드의 시대에요.
저도 현장에 있으니까 여러 가지 의견을 듣고 있습니다. 특히 요즘같은 시대에 정통 포인트가드를 운운하면 꼰대소리 듣기 딱 좋죠. 개인적으로는 정통 포인트가드, 듀얼가드 고르게 나와서 다양한 농구를 보고싶은게 바램입니다. 두 스타일은 제각각 장점이 있어요. 제가 전자에 속하는 만큼 정통 1번의 장점을 말해보자면 이른바 눈으로 보이지않는 영향력이 큰점을 들고싶어요. 경기조율이라는 부분은 기록지에 직접적으로 적히지않는 경우가 많아서 평가하기가 상당히 이매해요. 다만 팀을 승리로 이끌고 나머지 팀원들의 경기력이 좋아진다면 ‘아, 저 선수가 리딩을 잘하고 있구나’ 판단할 수 있겠죠. 예전에도 그랬지만 요즘에는 더더욱 뛰는 농구가 대세죠. 런앤건처럼 뛰는 것이 아니더라도 일단은 선수 각자가 제대로 뛰지못하면 살아남기 힘든 시대가 되었어요. 그만큼 체력도 더 중요해졌고요. 제가 선수들에게 체력을 계속 강조하는 것도 현 시대니까 더 그런 부분도 있죠.
Q.리딩이 좋은 가드가 있으면 동료들의 체력 세이브에도 도움이 될 듯 싶어요.
많이 되죠. 듀얼가드 체제에서는 다섯명의 유기적인 움직임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뛰고 또 뛰고 선수 각자가 자신의 포지션이나 역할을 스스로 잘 챙겨야 되요. 반면 리딩에 빼어난 정통 1번은 그런 부담을 많이 줄여줘요. 패싱 플레이를 통해 일부만 움직이게 할 수도 있어요. 때문에 그 시간동안 다른 선수들을 어느 정도 여유를 가져가는 움직임이 가능하고 다음 플레이에서 힘을 쏟아낼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죠. 이런게 당장 한두경기에서는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시즌이 거듭되면서 연전이 많아지다보면 그렇게 쌓이는 체력세이브는 장기레이스에서 분명 영향을 끼치죠. 외국인선수를 활용하는데 있어서도 분명 달라요. 외국인선수들은 개인 기록에 민감하거든요. 상대팀 외국인선수들은 계속 득점하는데 자신은 득점이 잘안되요. 그럼 마음이 조급해져서 무리한 플레이를 하다가 경기력이 다운되기도 해요. 그러한 순간에 가드가 한두번만 외국인선수가 쉽게 득점할 수 있도록 떠먹여주는 패스를 넣어주면 전체적인 분위기 자체가 확 달라지기도 하죠. 구태여 직접적으로 많은 수의 어시스트를 기록하지 않아도 내 손을 떠난 공이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고 다음 혹은 다다음 플레이에서 어시스트로 연결되면 그게 좋은 패스이고 그런 패스를 할줄 아는 센스와 흐름을 읽는 눈을 가진 선수가 정통 포인트가드라고 생각합니다. 정통 포인트가드가 좋고 듀얼가드는 나쁘다는 소리는 절대 아닙니다. 오해하지마세요. 정통 포인트가드가 가지는 장점만 언급했을 뿐입니다.
Q.마지막으로 농구인 주희정을 응원하는 팬 분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부족한 사람이지만 농구를 통해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농구가 있었기에 힘든 시절을 견딜 수 있었고 농구 선수로 뛰었기에 지난 시간들을 추억으로 만들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워낙 오랜시간 동안 선수로 뛰었던지라 여전히 팬분들의 함성소리가 귓가에서 잊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감사한 마음 가슴에 품고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모습 보여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과 주먹을 맞대고 파이팅을 외치고 싶지만 영상이 아닌 관계로 그럴 수 없는 점이 아쉽습니다. 마음으로 주먹을 내밀고 있으니 오셔서 함께 부딪혀주세요. 모두 모두 파이팅입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KBL 제공
기사제공 점프볼
김종수 oetet@naver.com
Copyright ⓒ 점프볼.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부자 구단으로의 트레이드? 전혀 기쁘지 않았습니다” (1) | 2023.04.12 |
---|---|
“선수 출신인 저보다 남편이 농구를 더 좋아해요” (0) | 2023.03.31 |
“철없던 시절의 야반도주, 인생의 또 다른 전환점이었습니다” (2) | 2023.02.28 |
“서장훈 선배 앞에서 덩크슛! 마스크의 힘이었습니다” (2) | 2023.02.14 |
“1층에서 떨어진 이효리, 저는 만족합니다” (1) | 2023.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