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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남북선수단 남측기수, 얼떨결에 맡았습니다”

농구인터뷰

by 멍뭉큐라덕션 2022. 10. 11.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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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남북선수단 남측기수, 얼떨결에 맡았습니다”

기사입력 2022.10.11. 오전 09:01 최종수정 2022.10.11. 오전 09:01

[김종수의 농구人터뷰(57)] '왕눈이' 정은순

’왕눈이‘ 정은순(51‧185cm)은 대한민국 여자농구사에서 정말 많지않았던 ’정통파 센터‘로 불린다. 선수생활 내내 포스트에서 전쟁에 가까운 몸싸움과 리바운드 쟁탈전을 벌였다. 좋은 신체조건을 가지고있음에도 골밑에서 벗어나 슛을 던지는 것을 선호하는 상당수 빅맨들과 달리 클래식한 플레이를 우선 순위에 두고 플레이했다는 점에서 더욱 높은 점수를 줄만하다.

끊임없이 포스트업을 시도해 유려한 피벗으로 수비수를 제치고 골밑슛 혹은 미들슛을 넣는 패턴은 그녀를 대표하는 주특기였다. 워낙 기술적 완성도가 높고 파워도 강해서 매치업 상대는 물론 도움수비를 들어오는 선수까지 제치거나 같이 달고 떠서 공격을 성공시키기 일쑤였다. 박신자, 박찬숙의 뒤를 잇는 역대급 정통파 센터라는 수식어가 전혀 어색하지않았다. WKBL 10주년 올스타전 팬투표 1위가 이를 입증한다.

이렇듯 정통 센터의 위력을 온몸으로 과시하던 정은순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올 어라운드 플레이어‘라는 또 다른 모습도 있었다. 워낙 골밑 플레이가 강하고 인상적이라서 그렇지 패스, 돌파, 슛 등 못하는게 없던 전천후 테크니션이라고 보는게 맞다. 외곽에서 뛰어들어와 돌파를 할 듯 하다가 포스트업으로 전환하며 수비수들을 당황하게 만든 다음 비하인드 백패스로 빈공간 동료에게 어시스트를 하는가하면 유연한 드리블로 왼쪽 오른쪽을 넘나들며 페이스업 공격을 성공시켰다. 수비수와 몸을 부딪혀가며 쏘는 미들 뱅크슛도 일품이었다.

정은순의 WKBL기록은 화려하다. 1998년에서 2002년까지 밖에 뛰지 못했지만 여름, 겨울리그 등에서 모두 두자릿수 이상의 득점을 올렸고 정규리그 통산 평균 16.53득점, 9.07리바운드, 3.65어시스트, 1.64블록슛의 성적을 남겼다. 1999년 8월 3일 WKBL 첫 번째 트리플 더블의 주인공이 됐으며 정규리그 MVP 3회, 리바운드왕 2회, 득점왕 1회, 블록슛왕 1회 등 다재다능함이 빛났다.

더욱 놀라운 것은 진짜 전성기는 농구대잔치 시절이라는 것이다. 만약 여자프로농구가 좀 더 빨리 시작되었더라면 각종 기록은 더욱 풍성했을 것이 분명하다. WKBL 최고의 센터답게 국가대표팀에서도 기둥으로 활약하며 올림픽, 아시안게임 등에서 맹활약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개막식은 분단 이후 역사상 최초로 올림픽 남북선수단 공동입장이 화제가 되었는데 당시 한반도기의 남측 기수를 맡은 선수가 바로 정은순이었다. 그녀가 농구계에서 어떤 존재였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Q.요새 어떻게 지내십니까?

’정은순 농구교실‘, 방과후 수업, 대학교 강의, 삼성 노블카운티, 그 외 개인적인 지도까지 농구 가르치는 쪽으로 정말 많은 일을 하고있어요. 한창 코로나 때문에 규제가 심할 때는 변수도 많고 해서 일정이 다소 들쭉날쭉하기도 했어요. 바쁠 때는 바쁘고 아닐 때는 한가하기도 하고, 아마도 농구쪽 일을 하시는 분들은 다들 마찬가지 였을 듯 싶어요. 하지만 차차 잦아들면서 다시금 일이 많아졌어요. 감사한일이죠. 그만큼 찾아주시는 분들도 많고, 일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절해야 되는 경우까지 생기더라고요.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있지만 제가 배운 농구를 다른 이들에게 돌려줄 수 있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Q.2019년 2월 CBS <새롭게 하소서>에 집사 신분으로 출연해 간증을 하기도 하는 등 신실한 신자로 유명합니다.

어릴 때부터 늘 함께 했어요. 특별한 의미를 두기보다는 늘상 옆에서 같이 걸었던 존재? 힘들거나 의지가 필요할 때 정신적, 마음적으로 도움을 받은 것 같아요. 운동하던 시절 여러모로 더욱 간절하게 신앙생활을 했고요.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없어요. 지금 현역 선수들은 저와 세대가 다르니까 어떤 선수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모르고요. 저 운동할 때 기억나는 신앙인 선수들로는 손경은 선배나 (조)혜진이가 먼저 떠오르네요. 어릴 때부터 정말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왔는데 그런 와중에 마음편하게 기댈 수 있는 가장 든든한 존재중 하나가 바로 신앙이었죠.

“몸싸움을 많이 하는 스타일이었음에도 단 한번도 수술을 받지 않았습니다”

Q.농구를 시작하게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초등학교 4학년 특별활동 때 처음 인연을 맺었던 것 같아요. 지금처럼 많이 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뒷줄에 앉았을 정도의 키였으니까 선생님들 눈에 띄게 됐어요. 코트에 나가보니 농구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감독, 코치님이 계셨고 저를 살펴보시더니 집으로 찾아오셔서 부모님께 ‘농구를 시켜보지 않겠냐’고 권유하게 되서 시작하게 됐죠. 체격도 좋은 편이었지만, 뭐랄까 저도 어떤 유망주를 보면 느낌이 오는 것처럼 당시 그분들도 그랬을 듯 싶어요.

Q.부모님들이 많이 크셨나봐요?

아버님은 180cm, 어머님은 165cm정도 되세요. 당시 기준으로 보면 평균보다 좀 나은편이지만 하은주나 김계령 선수 집안처럼 유전자 자체가 ‘운동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할 만큼은 아니었죠. 저희 친언니들도 165cm정도 밖에 안되니까요. 이왕 농구를 시작했으니 클수록 좋겠지만, 저도 사실 제가 어느 정도까지 클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어요. 제가 집안에서는 큰 편이지만 농구를 안했으면 175cm정도에서 멈추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농구를 해서 숨어있던 마지막 10cm까지 크게 된 것 같아요.

Q.뭔가 체계적으로 잘 관리를 받은 듯 해요?

맞아요. 정말 좋은 스승님을 만났습니다. 당시 중고등학교 은사님이신 고 심욱규 선생님께서 많이 신경을 써주셨어요. 자는 것, 먹는 것 등 디테일하게 관리를 해주시고 노하우도 가르쳐주셨던 기억이 나요. 잘먹고 많이 자고 운동도 기본기 위주로 가볍게 훈련했고요. 본격적인 체력 운동이나 다양한 기술 습득 등은 키가 거의 다 클 무렵인 중학교 3학년때부터 시작했어요. 덕분에 탄탄한 기본기를 깔고가면서 신체조건도 모두 활용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정말 은인 같은 분이죠. 만약 제가 키가 성장하던 무렵에 다른 친구들처럼 강하게 훈련하고 그랬으면 관절 다 망가지고 키도 덜 자라고 그랬을거에요. 현재도 저는 관절이 멀쩡해요. 선수 생활하면서 단 한번도 관절 쪽으로 수술을 해본 적이 없어요.

Q.정말인가요? 그렇게 투쟁적으로 골밑에서 싸워왔는데 수술을 한번도 안했다고요?

네. 말씀하셨다시피 저는 상당히 거칠게 플레이했던 선수에요. 승부욕도 있어서 골밑에서 강하게 몸싸움하고 부딪히고, 그런데도 어릴 때 관리를 잘 받아놓으니까 큰 부상없이 선수생활을 이어갔고 은퇴 후 일상 생활도 편하게 하고 있어요. 남녀 통틀어서 국내외 경기 엄청 많이 뛴 빅맨 중에 이렇게 몸이 멀쩡한 케이스는 정말 드물거에요. 저의 자부심은 농구 선수로서의 커리어가 아니라 ’한번도 수술하지않고 건강하게 선수 생활을 보냈다‘는 것이에요. 지금 생각해보면 심선생님은 시대를 앞서갔던 분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저의 사이즈와 건강은 심선생님의 관심과 지도 거기에 노력으로 만들어진 케이스같아요. 모두에게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충분히 참고해볼만한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유)영주는 최고의 친구이자 라이벌이었죠”

Q.언제부터 센터 포지션을 맡게된 것인가요?

또래보다 키가 컸던 편인지라 센터는 초등학교때부터 했지만 큰 의미는 없는게 처음부터 포지션을 정해놓고 배우지는 않았어요. 당시 키가 많이 클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플레이 스타일을 정통 센터하고는 조금 다르게 가져갔던 기억이 나요. 리바운드를 잡은 후 직접 드리블을 치고나가 드라이브인으로 상대 골밑을 돌파하고 그랬거든요. 심선생님께서는 저나 (유)영주에게 특정 역할에 묶이지 않고 두루두루 다양한 포지션을 경험하면서 농구에 대한 이해도 자체를 키워주시려고 했어요. 덕분에 저나 영주나 본인의 포지션에서 쉽게 나오지않는 플레이까지 가능하게 됐던 것이죠. 단순히 제가 저의 사이즈만 이용해서 플레이했다면 상대팀을 위협하는 센터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다재다능하면서 정통파의 느낌까지 주는 기량을 갖추게 된 것은 은사님 덕이 너무 크죠. 저나 영주나 행운이었죠. 좋은 지도자를 만났으니까요.

 

 

Q.유영주님과 인성여중, 인성여고 동기로 알고있어요. 둘이 4, 5번으로 버티는 골밑은 당시 무적이었을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저에게는 영주가 큰 동기부여가 된 것 같아요. 영주는 제가 있어서 더 열심히 할 수 있었다고하는데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영주가 유명세는 다소 늦게탔지만 옆에서 보는 입장에서 정말 잘하는 선수였습니다. 힘도 세고 기술도 좋고, 어쩌면 제 동년배 중 최고 라이벌이 옆에 있는 것이었죠. 더군다나 그렇게 잘하면서 정말 열심히 노력까지하니 저도 가만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서로가 서로에게 선의의 자극이 되는 관계였다고 기억됩니다. 저의 발전에는 영주의 지분이 컸습니다.

Q.중학생 때 최연소 청소년 대표에, 여고생때 국가대표에 발탁되는 등 그야말로 초고속으로 엘리트코스를 밟아나갔어요.

사람들은 저에게 엘리트의 길에 일찍 발을 들여놓았다고 말씀을 해주셨지만 개인적으로 ‘너무 앞서가는 것도 꼭 좋지는 않구나’하는 것을 느꼈어요. 몸관리하는 것도 배웠고요. 당시 무리한 강행군을 했던 탓에 갑상선기능항진증에 걸렸고 88년 서울올림픽 한달전에 퇴촌을 하고 말았어요. 선배님들과 나이 차이도 컸고 제 또래가 없다보니 분위기 적응도 쉽지않았죠. 거기에 막내다 보니 경기 외적으로 해야할 일도 많았구요. 몸도 힘들었지만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던 것 같아요. 결국 탈이 난거죠. ‘아프면 다 소용없구나’하는 것 등 여러 가지 경험 속에서 참 많이 배우고 느끼게 됐어요.

Q.라이벌팀 SKC와의 경기에서 친구 유영주에게 연거푸 3점슛을 허용하자 너무 화가난 나머지 종료 5초를 남기고 일부러 5반칙 퇴장 당해서 나갔다는 얘기도 들었어요.

1994~1995 농구대잔치 결승이었을거에요. 기억나요. 그날 (유)영주가 제대로 터졌어요. 쏘는 족족 3점슛이 들어갔어요. 하지만 저희도 문제가 많았죠. 아무리 그날 영주가 슛감이 좋다고해도 어떻게 결승시리즈같은 중요한 무대에서 한선수에게 3점슛을 6~7개씩 허용하냐고요. 정확히 몇 개였는지는 기억이 나지않지만 엄청 얻어맞았어요. 분위기도 확 넘어가버렸죠. 당시 삼성이 상대적으로 젊은 선수들이 많았어요. 좀더 노련했다면 2점슛을 허용하더라도 3점만큼은 맞지않으려고 좀더 바싹 붙는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한발만 더 들어가면 되는게 그것을 못하는거에요. 저는 포지션이 센터잖아요. 직접 부딪힐 일은 많이 없었지만 보고있자니 속이 터져서 ‘안되겠다. 내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냥 외곽으로 영주를 향해 달려갔어요. 얼떨결에 슛을 시도하는 영주를 덮쳐버리게 됐어요. 그날 너무 저희팀 수비가 설렁설렁하다고 생각해서 하려면 제대로 하자는 생각에 의욕적으로 파울이 나와버린 것 같아요.(웃음)

“다양한 플레이의 비결요? 관리와 노력이죠”

Q.포스트업, 탄탄한 리바운드 등 제공권을 확실히 장악하는 정통 센터로 명성이 높았어요. 지금도 이런 스타일은 상당히 드뭅니다.

주변에서 얘기를 들어봐도 저같이 포스트업을 많이치고 골밑에서 전투적으로 싸우던 센터는 이후에 거의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제가 저의 플레이에 대해 어떻다 저떻다 말하기는 어렵고요. 그냥 기본기부터 열심히 배워서 몸에 익은 스타일이 자주 나왔던 것 같아요. 다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그렇게 했음에도 수술할 정도의 큰 부상이 없었다는 것! 그게 참 컸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후배들에게 하고싶은 말이에요. 아무리 기술이 좋고 잘하면 뭐해요. 자주 부상당하고 몸이 아파버리면 잘 배워놓은 것을 제대로 쓸 수가 없잖아요. 지금은 시스템적으로 더 발전한 시대이기도하고요. 예전과 달리 팀에서도 잘 관리해주겠지만, 그래도 내 몸은 내가 지킨다는 생각으로 평소에 최대한의 관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타고난 내구성 차이도 있겠지만 관리할 수 있는 만큼은 최선을 다해야겠죠.

Q.정통 센터이면서도 슈팅력도 갖추고있고, 패싱 플레이에도 능해 토탈패키지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저는 사실 슛에 별로 자신감이 없었어요. 선호하지도 않고요. 하지만 슈팅력을 끌어올리기위해 많이 노력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슛이 어느 정도 들어가줘야 제가 잘하는 피벗 플레이를 마음껏 할 수 있으니까요. 팬들도 잘 아시잖아요. ‘저 선수는 슛이 없어’라는 이미지가 박히게되면 상대팀에서 수비하기가 매우 편해져요. 말 그대로 주특기만 신경쓰고 틀어막으면 되니까요. 다들 프로라는 이름을 걸고 뛰는 선수들인데 마음먹고 상대의 장점을 봉쇄하려고하면 아무리 해당 기술이 뛰어나다해도 여러모로 어려워지죠.

Q.본인이 생각하는 최고의 무기는 무엇이었을까요?

농구 기술적인 부분으로 봤을 때는 몸을 이용할 줄 아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하고요. 직접적으로 큰 관련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생각을 정말 많이했던 것 같아요. 이런 저런 상황을 연상하면서 이미지 트레이닝을 계속 했어요. 어느 정도 농구를 했다는 선수들은 제 말에 공감할거에요. 농구 코트 안에서만 탁월한 선수는 없을거에요. 그만큼 남보다 농구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을거에요. 모든 것을 농구와 관련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죠. 저같은 경우는 누구보다 생각을 많이했다고 나름 자부해요.(웃음)

남북선수단 공동 입장 한반도기 남측 기수, 얼떨결에 맡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영광이죠”

Q.국내 무대 못지않게 국제 무대에서의 활약상도 대단했죠. WNBA 최고의 스타 포워드 셰릴 스웁스가 올림픽에서 만난 정은순 선수를 극찬한 적이 있습니다.

아…, 그 선수가 저를 칭찬했나요? 포지션이 다른지라 직접적으로 매치업될 일은 없었지만 엄청난 선수라고는 기억하고 있죠. 최고의 무대 WNBA에서도 톱스타였고 그만큼 잘하던 선수였습니다. 스윙맨 스타일로 코트를 휘젓고 다녔는데 여성스럽고 모델 느낌나는 스타일로 팬들도 많았다고 하더라고요. 워낙 테크닉과 탄력, 스피드 등을 겸비해서 골밑으로 치고들어와도 사실상 저도 잘 못막았죠. 일대일 능력이 원체 좋은 선수였어요. 어차피 그 선수뿐만 아니라 미국같은 강팀과 만나면 개인대 개인으로는 힘드니까 패스 플레이 등으로 상대를 흔들어놓으려고 노력했어요. 그나마 할 수 있는게 조직력으로 승부를 걸어보는 것이니까요. 아마도 그런점을 칭찬했지 않나 싶어요.

Q.선수마다 궁합이라는게 있죠. 함께 뛰어본 동료중 ‘아, 이 선수랑 뛰면 너무 편하다’고 느낀 선수로는 누가 있을까요?

센터 입장에서는 전주원, 유영주, 박정은, 이종애같이 농구 센스가 뛰어난 선수들이 함께 뛰면 참 편하죠. 아마 누구나 마찬가지였을거에요. 저는 특히 제가 패스를 주려고하면 적절하게 뛰어 들어오는 선수가 좋았어요. 컷인 플레이가 잘되면 센터도 경기하기가 정말 수월해지거든요. 상대가 패스까지도 신경쓰기 시작하니까요. 영주, 주원이, 정은이, 종애 등이 패스도 잘받아주고 득점으로도 잘 연결시켜줬고 함께 뛰면 참 좋았던 기억이 나요.

Q.농구대잔치 시절 여자농구계에서 적지않은 폭언과 폭력이 만연했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던 시절이죠. 그래서는 안되지만 거칠게 가르치시는 분들이 좀 계셨습니다. 정말 운이 좋게도 저는 좋은 스승님과 팀을 만나 그런 쪽에서는 거의 당하지않고 농구를 했어요. 초등학교 3학년때인가 정말 심하게 맞은 적이 있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어린 것이 때릴 때가 어디있다고요. 이후 마음 속으로 ‘맞으면서는 농구안하겠다’고 다짐했는데 다행히 그런일도 생기지않았네요. 어떤 친구는 프로생활하면서 적지않게 당했다고 은퇴 후에 고백하더라고요. 당시에는 정말 몰랐어요. ‘내가 정말 쪽팔려서 그동안 얘기를 못했다’고 하면서 지난 일을 얘기하는데 정말 가관이더라고요. 정리를 하자면 지금과는 다른 분위기와 환경으로 흘러가던 시대였음은 맞고 폭력, 폭언도 존재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정도겠네요.

Q.2000년 시드니 올림픽 개막식에서 남북선수단 공동입장이 펼쳐졌는데 한반도기의 남측 기수를 맡았어요.

미리 준비된게 아니라 남북선수단 공동 입장이 시드니에 가서 결정이 났다고 알고있어요. 일사천리로 진행은 되었는데 알게모르게 신경전도 살짝 있었나봐요. 북한 측에서 남자, 남한 쪽에서 여자로 결정이 났는데 거기서 고 김운용 회장께서 ‘북한 남자보다 키가 큰 여자 선수였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니 배구, 농구로 확 좁혀진거죠. 거기다 ‘전세계 화면에 비치는데 단순히 키만 큰게 아니라 어느 정도 외모도 준수해야하지 않겠느냐’까지 조건이 들어가다가 저를 선택하게 된거에요. 그리고 통보가 들어왔는데 처음에는 안한다고 했어요. 왜냐하면 저희 여자 농구팀은 원래 개회식에 참여하지 않을 예정이었어요. 첫경기 호주전이 일찌감치 잡혀있었는데 그 경기를 잡아야만 4강에 갈 수 있었거든요. 온전히 경기에 집중해야 될 상황에서 저로 인해서 스케줄 자체가 바뀌게 되는 것이 주장으로서 부담스러웠어요. 다른 선수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 같잖아요. 그래서 감독님에게 안한다고 했더니 ‘가문의 영광으로 알고, 아무 소리 말고 해’라고 말씀하셔서 결국 하게 됐죠. 얼떨결에 맡게됐지만 지금 생각하면 엄청난 영광이죠. 단순히 하고싶다고 할 수 있는게 아니라 상황과 모든 조건이 맞아야되는 자리였잖아요.

“강제로 은퇴를 종용당했다고요? 거기에는 오해가 있습니다”

Q.출산을 하게되면서 32세의 나이로 은퇴를 하게 되었는데요. 강제 은퇴라는 얘기가 많았습니다.

그게 오해가 있어요. 이제와서 삼성 입장을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이 부분은 제 잘못이 커요. 임신, 출산을 하게되면 당분간은 선수로 뛰기가 어려워져요. 임신을 했다는 것을 알고 구단에서 ‘어떡할래? 선수 활동을 하려면 아이를 지워야 되는데?’라고 물어왔어요. 본의 아니게 팀에 피해를 입힌 상황이 되었지만 저는 엄마잖아요. 아이를 지울 수는 없죠. 그래서 안된다고 했더니 ‘그러면 남은 계약기간동안 코치로 활동하는 것은 어떠냐?’고 구단에서 제의한 것이에요.

Q.은퇴할만큼 큰 부상도 없었던 것이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선수 생활 내내 별다른 부상은 없었죠. 은퇴와 부상은 전혀 연관이 없었습니다.

Q.은퇴식 당시 기자회견 도중 ‘다시 선수로 복귀하고 싶다’는 발언을 했습니다.

제 실수입니다. 깔끔하게 선수 생활을 접으려고 했는데 금호생명 등 다른 팀에서 러브콜이 들어왔어요. 저도 어느 정도 미련이 남아있었던 것 같아요. 은퇴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흔들리지말았어야 되는데 자꾸 연락이 오니까 선수 복귀에 대한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다른 팀에서는 선수 생활을 권하고 삼성에서는 코치를 하라고하니 제 마음이 선수 복귀 쪽으로 기울게 됐어요. 그래서 ‘그럼 다른 팀에서 뛰어볼까?’라는 생각을 하게되었는데 너무 단순하고 깊지못한 처사였던 것이죠. 하필 얘기를 꺼낸 무대도 기자회견 중이었던지라 파장이 컸구요. 현명하지 못했습니다.

Q.그냥 원소속팀에게 ’나 계속 뛰고싶어요‘라고 말할 수는 없었나요?

입장차이였죠. 저는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 싶었고 구단은 코치를 권유한 것이고요. 그렇다고 아주 간절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 정도였다면 어느 정도 갈등도 있었고 저도 좀 더 강력하게 선수 생활 연장을 이야기했겠죠. 삼성하고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는데 밖에서 볼때는 저의 깊지 못한 발언 때문에 상황을 심각하게 인지한 듯 싶어요. 그래서 삼성에게는 미안하면서도 고마워요. 제 은퇴식을 그야말로 이전에 볼 수 없었던 규모로 성대하게 치러줬거든요. 준비하는 과정에서 갑자기 제가 번복을 하는 듯한 말을 해버리니까 삼성 입장에서는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어요.

Q.그래도 막상 은퇴를 한 후에는 현역에 대한 아쉬움이 컸을 것 같아요.

근데 또 은퇴 후에 아이를 키우면서 살다보니까 선수로의 복귀에 대한 의지나 용기가 크게 생기지않더라고요. 제가 중국리그에서 외국인선수로 제의를 받았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갈려고 했는데 아니다싶어서 포기를 했어요. 고민을 많이하다가 비행기 타기 일주일 전 쯤에 안되겠다는 연락을 했어요. 중국 구단측에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서 ‘아이를 떼어놓고 비행기를 타지 못하겠다’ 더불어 ‘중국에 가서 여기서 했던 것 만큼 경기력을 보여줄 자신감도 많이 떨어졌다. 팀에 마이너스가 되기 전에 솔직하게 말하고 안가는게 더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답변을 했죠. 그뒤에 그 팀에서 부랴부랴 다른 외국인선수를 수급했는데 뜻밖에 대박이 났어요. 이름값은 높지않았는데 중국리그에 잘 적응해서 좋은 기량을 선보였고 팀성적도 많이 올라갔다고 하더라고요. 오히려 솔직하게 말해준 저에게 고마운 부분도 있지않았을까요.(웃음)

“팬분들 사랑 잊지않고,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Q.은퇴 후, 소속팀이 4시즌 연속 준우승에 그치며 ‘정은순의 저주’라는 말이 돌기도 했어요. 뭐랄까. 되게 묘한 기분이었을 것 같아요.

제가 그말을 조금 늦게 듣기는 했어요. 해설할 때 그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저주라는 말이 나올 만큼 삼성이 전력이 좋은 편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다소 부족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선전한 경우가 많았죠. 제가 은퇴할 당시 바로 아래 후배가 (왕)수진이었고 그 밑으로 (박)정은이었어요. 저주라는 말이 어감이 좋지도 않거니와 괜스레 충분히 잘하고있던 후배들이나 팀에게 미안하더라고요.

Q.전주원 코치처럼 오래 선수생활한 이들이 부럽기도 했나요?

그런데 저는 혹시 복귀해서 뛰었더라도 (전)주원이처럼 오랫동안 현역 생활을 이어가지는 못했을 것 같아요. 저는 주원이처럼 내적으로 강한 사람이 아니에요. 주원이가 외유내강이라면 저는 외강내유라고 할까요. 속이 단단하지못해요. 그러다보니 은퇴를 하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일련의 과정들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힘들었어요.

Q.최근 국가대표 주전 센터 박지수가 공황장애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심리적 압박과 스트레스가 주원인이라고 하는데 누구보다도 그 마음이 더 공감되지 않을까 싶어요.

당연히 공감하죠. 저 뿐 아니라 농구계 선배들이라면 ‘힘들었겠구나’라며 안쓰러운 마음을 가질거에요. 다만 지수가 마음을 굳게먹고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서 돌아오기를 기대합니다. 요새들어 공황장애라는 말이 알려졌지만 과거부터 분명 존재했을거에요. 팀에서 에이스로 불리는 선수들, 국가대표 주축 스타들같은 경우 안팎에서 부담감이 엄청나요. 나에 대한 기대치가 있으니까 ‘거기에 미치지 못하면 어쩌지’하는 불안감은 늘 가지고 살죠. 그분들은 공황장애라는 것이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를 악물고 이겨냈다고 생각합니다. 국가대표의 기둥이기도하지만 어쩌면 지수 본인을 위해서 하루 빨리 털어낼 필요가 있어요. 지금 한창 전성기잖아요. 그시간은 돌아오지않거든요. 어쩌면 나중에 시간이 흘러 과거를 되돌아볼 때 개인 커리어도 그렇고 뛰어야 될 때 못뛴 것에 대한 아쉬움도 클 수 있어요. 저도 다른 분들처럼 힘내라 등 좋은 말만 하고싶지만 비슷한 상황을 경험해본 선배 입장에서 말을 꺼내보았습니다. 이것 꼰대라고 욕먹는 것 아닌지 모르겠네요.(웃음)

Q.따님이 있는데 농구를 하다가 부상으로 지금은 그만뒀다고 들었어요.

무릎에 자꾸 물이 차서 빼내는 과정을 반복해야 했어요. 병원에서는 ‘수술을 하던지 아니면 운동을 하지말라’고 말하더라고요. 팩트는 딸아이는 수술후 힘든 재활을 감수하면서까지 농구를 계속하고자하는 열정이 없었어요. 신체조건이 좋아서 제가 권유를 해서 농구를 시작하게되었는데 본인은 그렇게까지 미련이 없더라고요. 딸의 얘기를 듣고 본인이 간절하게 원하지도 않는데 다치면서까지 할 의미는 없을 것 같았어요. 정말 수술도 불사하면서 죽기 살기로 운동하는 사람들보면 본인이 좋아서 하는거잖아요. 그것이 아니라면 다른 길을 찾아가는게 맞죠.

Q.계획하고 있는 일들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뭔가를 계획하고 있다던가 그런 것은 특별히 없고요. 그간 여러 가지 일들을 은퇴하고 겪었잖아요. 버릴 경험은 없다고 생각해요. 많은 시간동안 내적인 공부를 쌓아왔어요. 만약 제가 다시 농구인으로서 기여할 일이 조금이라도 주어진다면 그동안 공부해왔던 모든 것을 쏟아붓고싶어요. 막 선수 은퇴했을 당시에는 ‘왜 이게 안되는 것이지?’등의 좁은 시각도 가지고 있었지만 오랜시간 동안 두루 사람들을 가르치다보니 다양한 입장을 헤아릴수 있게되었습니다. 지도자로서 한 팀을 맡아서 이끌어가보고 싶은 것은 현재 제 유일한 꿈이에요. 만약 영영 그런 기회가 오지않는다 하더라도 현재 하고있는 아이들을 성장시키는 것에는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아이들은 워낙 가능성이 무한해서 아직 발견되지 않은 장점이 많더라고요. 그것마저 끌어내서 성장시키는데 일조하고픈 마음이에요.

Q.마지막으로 여전히 선수 정은순을 기억하고 사랑해주시는 팬분들에게 인사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은퇴후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가장 많이 죄송하고 감사한 존재는 팬분들이세요. 은퇴한지 한참이 지난뒤 WKBL에서 있었던 10주년 올스타전에서 팬투표 1위에 뽑히기도 했어요. 아직까지도 아니 평생 잊지못할 고마움이죠. 그런 고마운 팬분들에게 좋은 소식만 들려줘도 모자란데 그렇지못한 얘기도 듣게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팬분들께서 저를 믿어주시고 격려해주시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습니다. 믿어주시는 만큼 더 꿋꿋하고 굳건하게 살아가면서 보답하고픈 마음이 큽니다. 늘 건강하시고 좋은 일 가득하세요.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점프볼 DB, 문복주 기자

기사제공 점프볼

김종수 oete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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