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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하면서 세상의 욕이란 욕은 다 먹어봤죠”

농구인터뷰

by 김종수(바람날개) 2022. 11. 15.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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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하면서 세상의 욕이란 욕은 다 먹어봤죠”

기사입력 2022.11.15. 오전 09:01 최종수정 2022.11.15. 오전 09:01

[김종수의 농구人터뷰(61)] '미스터 봉' 봉하민

농구대잔치 포함 국내 농구 역사에서 가장 강한 팀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이름이 있다. 실업 기아자동차다. 프로화 이후 기아 엔터프라이즈로 이름이 바뀌기도 했는데 지금도 회자되는 전설의 라인업 허동택(허재, 강동희, 김유택) 트리오+한기범이 중심에서 활약하며 실업 농구의 절대강자로 군림한 바 있다. 허동택 트리오는 이후 국가대표 스몰포워드 김영만이 합세하며 허동만 트리오로 명성이 이어진다.

어떤 팀보다도 강하고 화려했던 기아 역사에서 수비전문선수였던 이훈재와 함께 대표적인 마당쇠로 언급되는 선수가 있다. KBL세대에게는 심판으로 더 유명할 수도 있는 ‘미스터 봉’ 봉하민(51‧190cm)이 바로 그다. 같은 학년에 쟁쟁한 유망주들이 많았던 탓에 하위권팀 동국대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당시 최강팀 기아에서는 봉하민의 숨은 재능을 인정해주고 품에 안는다.

당시 기아는 주축 멤버들이 조금씩 나이를 먹어 가고 있던 상황이었던지라 팀의 미래를 이끌어갈 새로운 피를 발굴하는데도 상당한 신경을 썼다. 봉하민도 그중 한명이었다. 어지간한 포워드와 비슷한 신장을 가진 장신 슈팅가드인데다 공수 밸런스가 좋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으며 외모까지 준수해 충분히 키워볼만한 원석이었다. 각종 예능프로그램에 허재, 강동희, 김유택 등 주축 선수들과 함께 얼굴을 비치기도 했다.

스타트는 나쁘지 않았다. 비록 동 포지션에 허재라는 최고의 선수가 있어서 대학 시절의 다재다능함을 버리고 수비 전문으로 뛰기는 했어도 1994~95 농구대잔치 당시 삼성전자 문경은을 전담마크하며 기아자동차 통산 6번째 우승에 한몫 보탰다. 이후 상무에 입대해서도 두차례 결승에 오르는데 기여했다.

선수가 성장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동 포지션의 경쟁자 유무와 감독의 선호도다. 아쉽게도 봉하민은 너무 어려운 상대들과 자리가 겹쳤다. 제대 후 돌아온 기아자동차에는 국가대표 스몰포워드 김영만이 있었으며 허재 트레이드 후에는 3점슛 왕 출신 정인교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당시 최고의 완전체 3번으로 꼽히던 김영만은 제칠 수 없었지만 정인교는 단신에 수비 약점이 뚜렷한 선수였다. 봉하민은 그 틈을 파고들어 잠시 주전급으로 뛰기도 했으나 이후 사령탑이 바뀌면서 다시금 정인교에게 밀려 수비 전문 식스맨으로 밀려나고 만다. 팀에 입단한 이후 여러 가지 상황상 공격 쪽에서 역할을 부여받지 못했고 결국 수비외 부분에서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다.

이는 골드뱅크 등 타팀에 가서도 자리를 잡지 못하게 된 이유 중 하나로 작용했고 결국 디펜더로만 선수 시절을 보내고 8년여의 현역 시절을 마감하게 된다. 만약 차라리 기아같은 강팀이 아닌 다른 곳에서 데뷔했더라면 커리어가 어땠을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상당수 관계자들은 당시 기준으로 좋은 사이즈에 여러 쪽으로 재능이 있었던 만큼 좀 더 나은 활약을 펼쳤을 것으로 예상한다.

“스트레스 덜 받고 농구를 즐기기 위해 다른 쪽 직업을 선택했습니다”

​Q.요새 어떻게 지내십니까?

두 가지 일을 하고 있어요. 우선 농구 쪽에서는 예전 심판 출신으로서의 경력을 살려 현재KBL 판독관을 하고 있습니다. 농구인으로서 계속해서 농구 관련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기쁨을 느끼면서 즐겁게 하는 중이죠. 다만, 저도 한집안의 가장인데 오로지 판독관만으로는 생활이 쉽지 않아요. 배정형식이라 전 경기에 참여하는 것도 아닌지라 시간적인 여유도 있고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커피 공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원두커피 볶는 일을 하고 있죠.

​Q.의외네요. 원래부터 커피 쪽에 관심이 많으셨나요?

아뇨. 주변에서도 비슷한 질문을 듣기는 했는데 전혀 아닙니다. 그렇게 커피가 좋았으면 커피전문점이라든지 그런 것을 했겠죠. 심판 생활까지 그만두면서 생계를 생각해야 됐던 상황에서 지인들의 도움으로 커피 공장을 하게 됐어요. 저같은 경우 농구인뿐만 아니라 다른 쪽에도 지인들이 꽤 있거든요. 두루두루 사람을 사귀게 된 것이 좋은 쪽으로 작용한 듯 싶어요. 개인 손님보다는 업체 도매 위주로 운영하고 있고요. 한 8~9년 정도 된 것 같아요. 처음에는 힘들기도 했지만 이제는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주로 가족들이 함께하며 운영해 나가는 중이에요.

​Q.농구인으로 돈을 벌던 시절과 비교해서 수입적인 면은 어떤가요?

하하핫…, 금전적인 부분만 놓고 보면 심판할 때 아니 선수 때보다도 좀 낫죠. 아무래도 농구인들이 은퇴하고 나면 할게 그렇게 많지 않거든요. 평생을 농구만 해온 터인지라 어떤 면에서는 일반인들보다도 새로운 영역에 대한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아요. 지도자 쪽이야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있는게 아니잖아요. 능력에 더해 인맥이나 여러 가지 운대도 맞아야 하고, 농구교실 같은 것은 요새 워낙 많이들 하고 있어서 자칫 영역이라도 겹치면 서로 얼굴 붉히는 일도 생길 수 있겠더라고요. 사실 심판 생활하면서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았거든요. 이제는 좀 편하게 농구를 즐기고 싶기도 했고요. 그러다 보니 농구와 관련이 없는 일을 알아보게 됐고 마침 지인 중에 커피 관련 일을 하는 분들이 있으셔서 저도 이일을 하게 됐습니다. 어쨌거나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독립이 되어야 농구쪽 일도 즐기면서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Q.지도자 쪽은 아예 생각을 안하고 계신 것인가요?

생각이 아주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현재는 마음을 내려놓고 있는 상태죠. 지금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부분도 크고요.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지도자라는 것이 내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게 아니잖아요. 그런 분들은 정말 농구인 중에서도 극소수이지 않을까 싶어요. 예전에 비하면 많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학연적인 부분도 무시할 수는 없고요. 제가 기아색이 강해서 그런지 몰라도 중앙대 출신인 줄 아는 분들이 상당히 많으세요. 사실 저는 동국대 출신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살짝 불리한 부분도 있었어요. 물론 아주 능력이 출중했다면 출신을 떠나서 일찍부터 지도자 쪽으로 갔을지도 모를 일이죠. 이런 학연 문화를 별로 나쁘다고 보지는 않아요. 지나치면 문제겠지만 선배가 후배들을 끌어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부분도 분명 있거든요. 개인적으로는 부럽기도 하고요.(웃음)

Q.농구 쪽에서 학연이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애당초 고교 시절 연세대, 고려대, 중앙대 등을 노려볼 수 있지 않았나요?

나중에 보니까 ‘아…, 출신 대학도 중요하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된거지 고등학교 시절에는 뭘 알았겠어요. 더욱이 그때는 감독님 말이 법이라 그냥 이쪽으로 가라 하면 대개는 그대로 따르거든요. 대경상고 3학년 때 동국대총장기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MVP도 받았어요. 선수로서의 경쟁력도 나쁘지 않았죠. 하지만 감독님께서 진작에 동국대로 진로를 정해줘서 다른 선택지가 없었어요. 나중에 얘기 들어보니까 다른 대학에서도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다고는 하던데, 뭐 이미 계약까지 다 마친 상태였고 저도 순리대로 가자는 주의였던지라 딱히 불만은 없었습니다. 다들 그랬어요. 물론 어쩌다 ‘저는 저 대학아니면 절대 안됩니다’하고 우기는 선수들도 있기는 한데 그러려면 정말 깡도 좋아야 하고 무엇보다 본인 입지가 아주 탄탄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저같은 경우 특정 대학에 가고 싶다고 우겼어도 별것 없었을 듯 싶기는 합니다. 어느 정도 활약을 펼치기는 했지만 타 학교 동년배들 중에 굉장한 또래들이 많았거든요. 광신상고 문경은, 용산고 김승기, 김재훈, 송도고 홍사붕 등 완전 황금세대였어요. 다들 명성이 쟁쟁했거든요.

Q.지금도 특정대학 선호현상은 여전하다고 알고 있어요. 용 꼬리보다 뱀 머리를 선택하는 선수들도 있고요.

그러게요. 아무래도 농구는 특히 어느 대학 출신이냐는 메리트가 크게 작용하기에 그러지 않나 싶어요. 그래도 예전보다는 덜하겠죠. 프로화가 되면서 본인만 잘하면 이름값이 떨어지는 대학에서도 스타가 나오고 있으니까요. 용 꼬리냐 뱀 머리냐는 각자가 알아서 선택할 문제지만 성장에 대한 자신감만 있으면 눈높이를 낮춰서 대학을 들어간 후 출장시간 많이 받으면서 실력을 쌓아나가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중앙대도 한기범, 김유택, 허재 선배들이 잘하면서 명문으로 거듭났잖아요. 정통을 후배들이 계속 이어갔고 현재는 선후배간 끈끈함이 연고대 못지않죠. 다른 학교들도 좋은 선수들이 꾸준히 나온다면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추승균, 양동근, 조성민의 한양대, 조성원, 김시래의 명지대, 김성철, 강혁, 김종규의 경희대 등 어떤 선수하면 딱 생각나는 대학들이 있잖아요. 잘되면 본인뿐 아니라 학교까지 빛낼 수 있죠. 저희 동국대도 (김)승현이가 있고요. 충분히 잘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승현이가 좀 더 롱런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해요.

“좋은 심판요?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심판이죠”

Q.아무래도 팬들에게는 선수 봉하민 못지않게 심판 봉하민이 유명해요. 어떻게 심판을 하게 된 것인가요?

스스로 지원했어요. 지도자 수업을 받을까도 생각했지만 때마침 KBL에서 심판 모집공고가 올라와서 문득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당시 심판들에 대한 세대교체 등이 많이 이뤄지던 시기에요. 어찌보면 심판은 시기를 막론하고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직업이잖아요. 그때도 그랬어요. 농구대잔치 시절 심판들이 KBL 초창기에도 심판을 하고 있었는데 판정문제, 매끄럽지 못한 경기 진행 등을 지적받으면서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했죠. 사실 그렇게 한다고 뭔가 파격적으로 변하지 않을 것이다는 것은 협회측에서도 알았을거에요. 단지 분위기 전환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어요. 딱 그 타이밍에 저에게도 심판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패기있게 지원하게 된거죠.

Q.처음 동기는 그랬을지 몰라도 농구판에서 심판이라는 직업은 욕을 많이 먹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죠. 심판은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거나 하다못해 중계 화면에 얼굴만 비쳐도 그날 경기는 잘못한게되요. 판정 잘 했다고 카메라가 비쳐 주지는 않거든요. 문제가 생기거나 다툼이 벌어졌을 때 거기에 관련되거나 낀 심판 얼굴이 쓰윽 드러나게 되죠. 욕먹은 횟수로만 따지면 역대 심판 중 저도 상위권이지 않을까 싶어요. 일단 저는 선수 출신이잖아요. 거기에 인기구단 기아 소속이었고요. 다른 심판들은 몰라도 제 이름 석자는 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아닌 다른 심판 쪽에 문제가 생겨도 저한테 화살이 날아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현장에 있다보면 장난아니에요. 온갖 비난을 넘어서 그냥 다이렉트로 쌍욕이 들어오기도 해요. 이름이 불려지면서 경기 내내 욕설을 듣고 있으면 자괴감이 들기도 하고 그랬죠.

Q.선수 시절 못지않게 집중력이 필요 했을 듯 싶어요.

못지않게가 아니라 이상이라고 봐야죠. 사실 선수 시절에는 식스맨으로 많이 뛰기도 해서 제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떠안을 상황도 위치도 아니었죠. 교체 멤버로 궂은일 열심히 하고 그날 슛감이 좋아서 결정적인 공격 몇 번만 성공시켜도 사방에서 칭찬이 쏟아졌어요. 하지만 심판은 달라요. 스포트라이트라고 하기는 우습지만 온갖 시선이 집중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잖아요. 선수가 한번 하는 실수는 웃고 넘어갈 수 있으나 심판이 그렇게하면 난리가 나거든요. 정말 한팀의 에이스 이상으로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됐죠. 그래도 선수 생활을 했던 것이 도움이 되기는 했어요. 기본적인 룰 숙지나 전술에 대한 이해도 그리고 무엇보다 전체적인 경기 흐름을 읽을 수 있는지라 좀 더 유연한 대처가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Q.어쨌거나 승패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자리인 만큼 상황에 따라 쏟아지는 비난의 수위가 상당히 높았을 것으로 보여요.

그렇죠. 단순히 판정결과에 대해 잘했니 못했니 하면서 언성이 커지는 수준이 아니에요. 저도 운동을 해서 어지간한 욕이나 비난에는 익숙한 편인데 그런 저조차 벙찔 정도로 온갖 창의적인 욕설이나 언어공격이 막 들어와요. 정말이지 말이 창이나 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니까요. 더욱이 공격 대상이 정해진 것이 아닌 불특정다수가 대부분이잖아요. 심판을 하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어느 정도 예상을 했고 매 경기 마음의 준비를 함에도 불구하고 맷집(욕에 대한)의 한계를 느끼는 순간도 종종 찾아온다니까요. 아! 같이 욕하고 싸우겠다는 뜻이 아니에요. 여기서 말하는 맷집은 그냥 멘탈에 금이 쩍쩍 간다는 말을 돌려서 얘기한 것입니다.

Q.‘내가 무슨 엄청난 대가를 받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욕을 먹어야 되나?’싶을 때도 있을 것 같아요.

항상 그러면 심판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겠지만 심판도 사람인지라 정말 어쩌다 한번 씩은 깊은 한숨과 함께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었어요. 말씀하신 데로 심판이 돈을 많이 받고 그런 직업은 절대 아니잖아요. 저같은 경우 첫해 초봉이 1년에 1,800만원 정도였으니까 금액적인 메리트는 크게 없었죠. 물론 이후에 조금씩 오르기는 했지만 심판 생활 15년 정도 하면서 금전적으로 넉넉하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이제 심판이 아니지만 KBL이라는 최고의 무대에서 뛰는 후배 심판들이 좀 더 나은 대우를 받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러려면 농구 인기가 좀 더 올라가야 하겠죠. 농구대잔치, 프로 초창기에 비해 많이 떨어진 것이 사실이잖아요. 흥행이 되어야 단체의 자금력도 올라가고 관계된 이들 역시 더 나은 대우가 가능하겠죠.

Q.심판 초창기 때는 아무래도 나이가 어린지라 선후배, 사제관계 등으로 얽힌 지도자들을 상대하는게 쉽지 않았을 듯 싶어요.

맞습니다. 선수 출신이니까 더 그렇죠. 지금은 좀 덜할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한국의 농구판은 그런 관계를 무시할 수 없거든요. 심판이야 어떠한 순간에도 흔들리거나 중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배우고 그렇게 움직이려고 해요. 하지만 그분들 입장에서는 ‘저 어린놈이!’ 혹은 ‘심판 완장 찼다고 사람이 저렇게 거만하게 싹 바뀌어버리네’, ‘우리가 프로 무대서 얼마나 친했는데 서운하게 이럴거야’ 등 여러 가지 생각이 들 수도 있죠. 한경기 한경기 살 떨리는 승부의 세계잖아요. 평소에는 성격이 참 좋은 분들도 접전상황에서 우리 팀에 불리한 콜이 들어왔다? 그러면 소위 확 돌아버리는 거죠. 뭐가 나빠서가 아니에요. 그만큼 승부에 몰입했고 그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기에 감정 컨트롤이 되지 않을 때가 있어요. 개인적으로는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심판이 거기서 흔들리는 것은 더 말이 되지 않고요. 그래도 나름 선수 출신인지라 많은 분들과 알고 있어서 다툼이 생기게 되면 제가 가서 설명을 드릴 때가 많았어요. 그러다 보니 심판이 해야 할 일은 하되 최대한 기분 상하지 않게 유하게 대처하는 노하우가 생기더라고요.

Q.이후에는 연차가 쌓이면서 노련한 운영이 가능했겠지만 초년 시절에는 한 성질하는 선배들이 와서 눈 치켜뜨고 그러면 부담스럽지 않으셨나요?

완전히 아무렇지도 않을 수는 없죠. 하지만 거기서 위축이 된다거나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서 제대로 된 판정을 못하고 운영을 원활하게 진행하지 못한다면 다음부터는 해당 감독이나 코치들이 있는 팀 경기에 배정이 안되겠죠?(웃음) 심판들도 다양한 상황을 그려가면서 많은 교육을 받아요. 설사 아버지 뻘이라고 해도 경기에서만큼은 잊어버려야죠. 그걸 의식해서 말이나 행동을 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이미 심판이 아닌거잖아요.

Q.선수, 심판을 거쳐 판독관을 하고 있잖아요. 이것저것 다 경험해보면서 각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그런 부분도 많이 느셨죠?

그렇죠. 아무래도 직접 겪은 것과 아닌 것은 천지차이니까요. 땀 흘리면서 뛰는 선수든, 지시하는 감독이든지 간에 경기에 몰입하다 보면 모든게 내 위주로 보여지고 느껴질 때도 많아요. 간발의 차이로 공이 내 손에 먼저 맞고 나갔어도 접전상황에서는 상대에게 먼저 닿았다고 인식하게 되요. 속이려고 거짓말을 하는게 아니에요. 현재 그 선수, 그 감독 입장에서는 그게 진실인거죠. 때문에 심판이 정확하게 봤어도 이해시키기가 힘들 때도 있죠. 아니라고 확신하고있는데 거기서 뭘 어떻게 하겠어요. 냉정하게 나가면 서운하다고 뭐라고 하는 마음도 이해합니다. 저 역시 현역 때 경험이 있으니까요. 더불어 후배 심판들이 느끼는 고충도 충분히 공감하고요.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까 실수도 있고, 뛰고 땀 흘리면서 몸을 부딪히는 종목의 특성상 감정적으로 쉽게 격해지기도 하죠.

Q.인터넷에 유명한 사진이 하나 있더라고요. 추일승 감독이 배를 들이밀면서 당시 심판 봉하민을 향해 항의를 하는…, 팬들 사이에서는 ‘오죽하면 저 성격 좋은 분이 저렇게까지 하시나?’라는 말도 나왔고요.

맞습니다. (추)일승이 형님 성격 좋으시죠. 오죽하면 별명이 코트의 신사겠습니까. 공부도 많이 하시고 여러모로 존경할만한 분입니다. 개인적으로 기아에서 선수 생활할 때는 트레이너도 하셔서 친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승부의 세계는 또 다른 것이고 코트에서는 사적인 친분같은 것은 배제해야 되는게 맞죠. 저로서는 최선의 판정을 내렸지만 형님 입장에서는 분명 당시 판정이 받아들이기 힘드셨을겁니다. 누가 맞다 틀리다를 떠나서 양쪽의 입장이 그렇게 갈리는 경우도 부지기수입니다. 더불어 별로 화가 나지 않았는데 전략상(?) 격하게 항의하는 경우도 있어요. 분위기 쇄신 등 여러 가지 이유로요. 유재학 전감독님, 유도훈 감독님 등이 그런 것 참 잘하세요. 한마디로 화냈다가 달랬다가 그 짧은 순간에도 여러 방식으로 줄다리기를 하는거죠.

Q.그런 점에서 비디오 판독은 참 좋은 장치같아요.

맞습니다. 저 역시 비디오 판독이라는 제도에 있어서는 참 좋은 시스템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제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수긍할 수 있게 되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매한 경우가 있어요. 정말 찰나인지라 영상으로도 확인이 쉽지 않거나 하필 잘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심판도 참 힘들죠. 결국 합의를 거쳐 판정을 내릴 때가 있는데 여기서 손해를 보는 팀의 감독이나 선수들은 그야말로 발끈할 수밖에 없죠. 그러다보니 판독관을 하다보면 저에게 와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감독님들도 계세요. 이해합니다. 얼마나 억울하다고 느끼셨으면 그러시겠습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어요. 판독관은 말 그대로 판독할 뿐이지 심판 권한을 침범할 자격도 힘도 없죠. 감독님들이라고 그 사실을 모르시겠습니까. 그만큼 속이 답답하니까 저에게까지 하소연을 하시는 것이겠죠.

Q.하소연을 하시면 어떻게 반응하세요?

저는 어느 편도 들 수 없으니 둥글둥글 분위기를 풀려고 하죠. ‘형님, 저 이제 심판 아니에요. 저한테 말씀하셔도 제가 바꿀 수 있는게 없어요’라고 하던가, 아니면 ‘제가 볼 때는 저것 파울맞아요’라고 말을 하기도 해요. 왜냐면 이미 판정이 내려졌으면 돌이킬 수 없고 감독님들도 알면서 답답한 마음에 저에게까지 하소연을 하신 것이니까요. 여기서 키 포인트는 최대한 웃는 얼굴과 부드러운 말투를 쓰죠. 그러면 ‘그래?’하면서 감정을 추스르고 돌아서는 분들이 대부분이세요.

Q.경기가 끝난 후에도 항의를 하는 경우도 있죠?

많지는 않지만 그런 상황도 가끔 벌어집니다. 지금은 한걸음 떨어져서 보니 그런 감독님들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심판도 사람인지라 실수는 할 수 있지만 경기 결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판정만큼은 안해야 되겠죠. 경기 후까지 항의가 이어지는 경우는 심판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만큼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이니까 맞다고 판단됐더라도 이후 이의제기가 들어오면 설명회 등을 통해 정확하게 전달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Q.심판복을 벗고 개인으로 돌아간 후에까지 연락해서 뭐라하는 경우도 있었나요?

아유…, 그건 아니죠. 정식으로 설명을 요청한다거나 그럴 수는 있어도 개인대 개인으로서 연락을 취해 화를 낸다거나 서운함을 표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저 역시 그런 일은 한번도 겪어보지 않았고요. 아주 예전에는 그랬다는 얘기도 들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러면 난리납니다. 단순한 감정대립을 떠나서 심판과 팀 관계자 혹은 감독이 따로 만나거나 통화를 한 것 자체도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요. 워낙 민감한 시대잖아요. 오해를 살만한 상황은 만들지 말아야죠. 생각해보면 예전에는 정말 무지했어요. 어떤 선수 하나는 카메라가 돌고 있는 와중에 스포츠 토토용지가 발견되어서 말 그대로 그간 쌓아온 커리어가 다 망가져 버렸잖아요. 아무짓 안해도 오해가 생길 수도 있는데 사서 문제를 일으킬 정도로 앞뒤 구분 못하는 이들은 현재는 거의 없을겁니다.

“크게 욕심내지 않고 한걸음씩 가려고 합니다”

Q.아까 동국대 진학은 감독이 정해줘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서 갔다고 했잖아요. 그 뒤 대학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을 텐데 하필이면 기아자동차를 행선지로 택했나요? 당시 기아는 누가 가도 주전을 차지하기 힘든 상황이었을텐데요.

그렇긴했죠. 허동택 형님들이 곧 국가대표 주전인데 누가 제칠 수가 있었겠습니까. 어찌보면 출장시간에서 좀더 유리한 팀으로 갔던게 맞을 수도 있겠다 싶어요. 하지만 당시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는데 무엇보다 계약금 적인 문제도 컸어요. 산업은행, SBS같은 곳에서도 입단 제의가 왔거든요. 출장시간만 놓고 보면 그 쪽으로 가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하지만 계약금 차이도 있고 해서 조금이라도 더주는 기아 행을 택하게 됐죠. 좀 더 깊게 생각하지 못하고 단순했던 부분도 있지만, 기아로 간 것이 꼭 나쁘지만도 않았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레전드 선배님들과 함께하면서 좋은 추억도 쌓았고 우승도 경험했으니까요.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잖아요. 기아가 아닌 다른 팀에 갔어도 출장시간이 확 늘어나던가 주전 자리를 차지했다든지 같은 상황은 장담할 수 없는 거잖아요.

Q.그래도 선수인데 출장 시간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나요?

왜 없었겠어요. 사실 실업시절에는 그런 생각을 거의 안했어요. 허동택 선배야 어차피 나이 엄청 먹기 전까지는 경쟁할 상대들이 아니고 그냥 마음을 내려놓고 시키는 것만 하자고 생각하면서 순응하면서 생활했습니다. (이)훈재 형하고 둘이서 수비전문선수 포지션이었죠. 하지만 상무를 갔다 와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실업에서 프로로 바뀌었으니까요. 실업이야 선수가 옮기고 싶다고 옮길 수 없는 시스템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프로는 다르잖아요. 이적도 자유롭거니와 실업 시절과 달리 출장시간은 곧 연봉과도 직결이 됐던지라 저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어요. 그래서 트레이드를 강력하게 요청했는데 절대 놓아주지 않더라고요. 팀내 핵심까지는 아니었지만 적당한 가격에 잘 쓸 수 있는 식스맨이었던지라 가성비가 좋았거든요. 이후 몇시즌이 지나서 트레이드가 되기는 했어요. 하지만 트레이드도 다 때가 있는 듯 해요. 상무에서 막 돌아왔을 때는 폼이 꽤 좋았거든요. 그렇지만 이때 트레이드 당시에는 폼이 많이 떨어져 있던 때인지라 정작 가서도 만족스러운 경기력을 펼쳐 보이지 못했습니다.

Q.선수생활은 길지않았지만 KBL에서 농구인 활동은 오래 가져가고 있어요.

어찌하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제 모토가 ‘크게 욕심내지 않고 한 걸음씩 가자’입니다. 더 많은 것을 빨리 얻고자 뛰게 되면 자칫 넘어질 수도 있어요. 반면 한 걸음씩 가게 되면 속도는 느려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그럴 일이 거의 없겠죠. 짧게 보면 느린 것 같지만 길게 봤을 때는 그게 더 빠를 수도 있겠다 싶고요. 농구를 했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저 역시 농구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스트레스받고 힘들게 즐기고 싶지는 않아요. 프로농구판에서 직접적으로 직업을 구하려면 경쟁은 필수입니다. 자리가 한정되어 있는지라 다른 누군가를 밀어내거나 나간 자리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죠.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편하게 KBL에서 함께 하고 싶어요. 그러려면 더 열심히 커피를 볶아야 되겠죠.(웃음) 어떤 이들은 ‘너는 정체가 뭐냐? 농구인이냐? 커피인이냐?’며 농담을 던지시기도 하는데 저는 현재 생활이 너무 만족스럽습니다. 물론 저도 태생은 농구인인지라 직접적으로 농구에 관한 일도 하고 싶기는해 요. 기회가 닿는다면 아이들을 대상으로 재능기부 형식으로 방과 후 수업 이런 것은 열심히 할 자신이 있습니다. 오히려 가장 순수하게 농구를 가르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좋지 않을까 싶어요.

“인간관계의 기본은 예의와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Q.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느꼈던 것은 무엇일까요?

인간관계같습니다. 모두와 다 잘 지내기는 어렵겠지만 되도록 적을 만들지 않고 둥글둥글 함께하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거듭 느낍니다. 지금하고 있는 커피 사업같은 것도 좋은 지인들이 옆에 있었기에 가능했고요. 아무리 재주가 있어도 그것을 쓸 수 있게 도움을 주는 이들이 없으면 어렵습니다. 밀어주고 끌어주고 그런 것이 인간관계 아니겠어요. 제가 어느 한 방면에서 최고는 아니었어요. 하지만 그래도 프로농구선수로, 심판으로 그리고 현재 판독관과 커피 사업까지 잔잔하지만 큰 기복 없이 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런 것이 뿌리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Q.그런 인간관계를 유지해나가기 위한 가장 기본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제가 도덕 선생님도 아니고 크게 존경받을 만큼 훌륭한 인격을 갖춘 것도 아닌데 자꾸 얘기가 그런 쪽으로 빠져서 머쓱하기는 합니다. 어떤 이들은 ‘너나 잘해’그럴지도 모르겠어요.(웃음) 맞습니다. 뭐든지 말에 앞서 저부터 잘해야겠죠. 그래서 나이가 50살이 넘었지만 여전히 배울 수 있는 것은 배우려고합니다. 개인적으로 기본은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기본적인 예의와 배려죠. 시대가 바뀌어서 그런지 주위를 둘러보면 이른바 개성이 넘치는 후배들이 많아요. 예전처럼 나이가 어리다고 주눅들지 않고 할 말이 있으면 당당하게 하고 자기 의견 내는 것은 충분히 좋은 현상같아요. 자신만의 색깔도 뚜렷하고요. 다만 그러기에 앞서 기본적인 예의는 잊지 말아야 할 듯해요.

Q.맞습니다. 개성과 무례함은 구분해야 되겠죠.

그럼요. 얼마전 모 선수가 경기 감독관과 언쟁을 벌여서 벌금형 징계를 받았잖아요. 저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많이 씁쓸하더라고요. 예전처럼 선배나 어른 말이라면 무조건 고개 숙이고 수긍하라는 소리가 아니에요. 그냥 함께하는 선배나 형 혹은 삼촌이라고 생각하고 조금만 태도를 순화하면 어떨까 싶어요. 친구끼리 싸움할 때처럼 막 공격적으로 그럴 필요까지는 없거든요. 더욱이 그렇게 할 명분도 없는 상태에서요. 자신이 잘못했을 때는 깔끔하게 인정하고 고개를 숙이는 것도 멋진 개성입니다. 물론 나이 먹었다고 다 선배고 어른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세상이 변한만큼 연장자도 무조건 나이로 밀어붙이기보다는 거기에 걸맞게 언행을 해야겠죠. 어쨌거나 지금 KBL에서 일하는 여러 선배님들은 지금까지 농구가 발전해 오는데 힘을 보태신 분들입니다. 과거가 있기에 현재가 존재하는 만큼 기본적인 존중은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Q.시대의 변화는 인정하되 기본만 지키자는 말씀이군요?

그렇죠. 꼭 불같은 성격이나 특이한 행동만이 개성은 아닙니다.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예의와 배려를 가져가면서도 신세대 감성을 표출 할 수 있어요. 대표적으로 허웅 선수도 있잖아요. 현재 농구 인기가 줄어든데는 방성윤, 김승현 등 한세대의 주춧돌 역할을 해줄 선수들이 확 타올랐다가 빨리 꺼진 영향도 없다고는 할 수 없을거에요. 기량은 확실했던 선수들인데 이런저런 구설수와 사건에 휘말리는 바람에 재능도 모두 발휘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롱런 부분에서 아쉬움을 남겼죠. 현재 악동과로 불리는 선수들이 그런 사례를 남기지 말고 오랫동안 활약하며 후배들에게 모범적인 방향을 남겼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Q.마지막으로 농구인 봉하민을 응원해주는 팬분들에게 인사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성이 특이해서인지, 기아라는 인기 팀에서 뛴 것 때문인지, 아님 궂은일 위주로 열심히 플레이한 것을 좋게 봐주셔서 인지는 몰라도 남긴 커리어에 비해 여전히 많은 분들이 기억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제가 인터뷰까지 할만한 사람인가 잠시 고민하기도 했지만, 저를 궁금해하시는 분들도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응하게 됐습니다. 팬분들이 있기에 저도 농구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고 이후의 행보도 가능했다고 봅니다. 농구 인기가 예전 같지 않다고는 하지만 정말 좋은 선수들이 리그에서 활약하고 있고 차세대 기대주도 적지 않습니다. 팬분들의 변함없는 사랑이 함께 하게 되면 다시금 농구대잔치 때의 불길이 치솟아 오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은은한 커피향처럼 좋은일이 일상에 자주 있으시기를 바래봅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KBL 제공, 본인제공

기사제공 점프볼

김종수 oete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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