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일지? 좋은 분위기가 아니었을까요”
기사입력 2022.11.29. 오전 09:01 최종수정 2022.11.29. 오전 09:01
[김종수의 농구人터뷰(63)] '사자' 강병수
“사람의 욕심이야 끝이 없겠지만 저 정도면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가진 것에 비해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가져갔으니까요”
현 수원여자고등학교 강병수 코치(54‧191cm)는 지금까지 자신의 농구 인생을 돌아보면서 만족한다는 표현을 자주 썼다. 이런저런 불리한 요소도 많았지만 그러한 부분을 감안하더라도 나쁘지 않았다고 자평한다. 명문대 진학, 실업팀 입단, 프로팀에서 주전으로 활약, 우승 경험, 다양한 지도자 경험 등 두루두루 겪어봤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합니다. 더 많이 이룬 사람들하고 비교하면 끝도 없잖아요. 지금 제가 한만큼도 부러워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거란 말이에요. 그때로 돌아가면 좀 더 열심히 노력할 것 같지만 어디까지나 가정이죠. 당시의 저도 게으른 사람은 아니었고 그만큼의 노력이 최선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말 속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강병수는 평탄한 농구 인생만을 걸어오지는 않았다. 남들은 충분한 경험을 쌓고 자기 색깔을 만들어나갈 고등학교 시절에 농구공을 처음 잡았고 이는 기본기, 구력 등에서 불리한 요소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파워포워드 포지션 역시 그에게 안성맞춤형 자리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일단 신장에서 많이 밀렸고 체형도 마른 편인지라 소위 말하는 몸빵도 쉽지않았다.
“190cm정도의 사이즈로 파워포워드를 소화한다? 그 정도되는 가드도 넘쳐나는 세상에서 살고있는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말도 안되는거죠. 당시에도 언더사이즈는 맞았어요. 평균 신장이 낮은 시절이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골밑에서 어느 정도 역할을 하려면 190cm후반대는 되어야했거든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국내 4~5번과 매치업되면 신장에서 10cm가량 차이나고 단신 외국인선수들같은 경우 키만 비슷하지 탄력, 기동성 등 신체능력에서 아예 상대가 되지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병수는 살아남았다. 국내 선수 기준, 사이즈 대비 운동능력이 좋은 축에 속했고 무엇보다 경기내내 쉬지않고 뛰어다니며 왕성한 활동량을 보였기 때문이다. ‘공이 떨어지는 곳에는 강병수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흡사 사냥개처럼 공을 따라다니며 조금의 틈만 보여도 망설이지않고 몸을 날렸다.
불리한 것 투성이였던 강병수가 여러 가지 족쇄에서 해방되어 가장 즐겁게 농구를 하던 시절은 역시 프로 초창기 원주 나래 시절이었다. 나래는 산업은행, 한국은행 출신 선수들이 주축이 되어 창단됐던 팀으로 KBL 원년 시즌 유력한 꼴찌 후보였다. 하지만 잘 뽑은 외국인듀오 칼레이 해리스, 제이슨 윌리포드에 3점슛 스페셜리스트 정인교가 화력을 책임졌고 장윤섭, 지형근, 김상준, 이인규 등 다양한 무명 벌떼들이 식스맨으로서 활약해주면서 챔피언결정전 준우승이라는 이변을 일으킨다.
이 시절 강병수는 주전 4번으로 중용되며 외국인센터 윌리포드와 함께 골밑을 책임지는 역할을 맡았다. 언더사이즈지만 파이팅이 넘치는 플레이를 통해 외국인선수들과도 맞섰다. 본인 또한 당시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어쩔 수 없는 전력 차이는 존재할 수 있겠으나 농구는 팀 스포츠입니다. 각자가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 함께 한다면 가지고 있는 것 이상의 힘을 낼 수 있습니다. 소위 분위기라고 하죠. 즐거우니까 더 노력하고 즐거우니까 한발 더 뛰게됩니다. 농구인으로 살면서 절대 잊지않으려고하는 부분입니다”
“열심히 배워가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Q.요새 어떻게 지내십니까?
선수 은퇴후 명지대학교 코치, KTF 매직윙스 코치, 고려대학교 코치, 감독을 거쳐 지난해부터는 수원여자고등학교에서 코치로 있습니다. 시즌은 끝난 상태지만 또 다음 시즌도 준비해야되고 학생들 기본기도 끊임없이 갈고 닦아야 되는지라 이것저것 준비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죠. 대부분 다른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일거에요. 시즌 때는 시즌데로 바쁘고 그렇지 않을 때도 그 다음을 위한 이것저것으로 머리가 꽉 차있습니다.
Q.그동안 했던 프로코치, 대학 코치, 감독 등과 여고부 코치는 나이대라든지 성별적인 특성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를것 같아요.
맞습니다. 다릅니다. 그래서 선수 출신인 조혜진 선생님을 A코치로 모셔왔어요. 저같은 경우 아무래도 남자 쪽에 오래있어서 여자 농구 쪽에는 부족한 것이 많아요. 기술적인 부분이야 큰 차이가 없을 수 있겠지만 농구라는 것은 기계가 아닌 사람이 하는 것이잖아요. 팀워크, 각 개인의 성향차이, 심리적인 부분 등 남성과 여성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더욱이 어린 학생들인지라 소통을 위해서라도 여성 지도자가 함께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은행 감독대행, 부일여중 코치, U19 여자농구 대표팀 코치 등으로 많은 경험을 쌓은 조혜진 선생님이 들어오면서 많은 도움이 되고있습니다. 실제로 조혜진 선생님이 합류한 후 있었던 첫 공식대회인 제103회 전국체육대회에서 21년만에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고요. 물론 여기에는 이러한 시스템으로 갈 수 있도록 배려해준 학교 측과 교장선생님의 도움도 컸죠. 두루두루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Q.남고부와 달리 여고부는 프로와 바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클 듯 싶습니다.
맞습니다. 같은 고등학생이지만 바로 이부분에서 차이가 크죠. 간혹 예외도 있지만 남학생들같은 경우는 대부분 대학이라는 곳을 한번더 거칩니다. 반면 말씀하신데로 여학생들은 바로 프로와 연결됩니다. 어찌보면 사회에 나가는 마지막 단계인거죠. 잘배워서 프로에 지명도 받게 하고 싶고 또 가서도 수원여고 출신으로서 잘하기를 바래고 있어요. 그러다보니 프로에 가기전에 시뮬레이션 비슷한 것도 해보고 여러모로 이것저것 구상하고 시도해보고 있죠. 그래야 프로에서도 더 적응하기 수월할 것 같기도하고…, 거기에 원하는 모두가 프로에 당장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니 그렇지않은 선수들같은 경우 대학행 등도 염두에 둬야하고요. 시집간 딸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이럴까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니까요.(웃음)
Q.WKBL에 대한 관심도 예전보다 높아지셨죠?
아무래도요. 예전에도 아예 무관심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제자들과의 연관성이 커지다보니 관심을 안가질 수가 없죠. 학부모들도 그런 경우 많잖아요. 특정 스포츠에 별 관심이 없다가 자녀들이 거기에 뛰어들게되면 준전문가 수준까지 되는. 하물며 저는 같은 농구인인데다 이런저런 이유까지 추가되니 좀더 들여다보게되네요. 어쨌거나 최근에는 다소 주춤했으나 수원여고가 정통의 명문이잖아요. 이곳으로 온 이상 예전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싶습니다.
“한양대와 고려대 사이…, 마음고생이 심했던 시기입니다”
Q.고등학교에 올라와서 농구를 시작했다고 들었어요.
고등학교 올라올 무렵 키가 185cm정도 된 것 같아요. 지금 기준으로보면 별것 없을지 모르지만 당시 또래들 사이에서는 꽤 큰 편이었죠. 거기에 제가 운동을 좋아해서 친구들하고 종종 농구경기도 즐기고 그랬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즐기는 수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죠. 당시 현대, 삼성에 유명한 선수가 누가 있는지, 쓰리세컨 바이얼레이션이 무엇인지도 전혀 모르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어지간한 농구 팬보다도 아는게 적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농구하는 것을 지켜본 한양대 김용근 감독님이 ‘본격적으로 배워보면 어떻겠냐?’고 권유를 하셨어요. 부모님께서는 운동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으셨지만 저는 재미있을 것 같아서 하고싶다고 고집을 부렸죠. 김감독님께서 추천해주셔서 전규삼 선생님이 계시던 송도고 농구부로 갈 수 있었습니다.
Q.전규삼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워낙 유명하신 분이니까요. 상당수 제자들이 그분을 감독님이라고 안부르고 선생님 혹은 할아버지라는 호칭을 썼을 정도면 설명이 될까요.(웃음) 무서울 정도로 엄격한 분위기나 환경이 대부분이던 당시 학원 스포츠에서 제자들을 사랑으로 감싸주시고 정말 많은 배려를 해주시던 분이세요. 그런 분 밑에서 인연을 쌓았다는 자체가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성적을 잘 못내거나 제자들을 못키운 것도 아니에요. 시대를 앞서갔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선진농구를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가르쳐주셨어요.
Q.선진농구요?
요새 스킬트레이닝이 뜨잖아요. 그분은 당시부터 다양한 기술 장착을 권유하셨습니다. 각 개인의 개성도 존중해 주셨고요. 예를 들면 플루터 있잖아요. 지금은 흔한 기술로 인정받지만 십수년 전까지만 해도 막슛이네, 성의가 없네 하면서 그렇게 던지면 혼을 내던 지도자도 적지않았어요. 하지만 선생님은 오히려 그런 기술을 적극 장려하셨죠. 본인도 해외파가 아니면서 오직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AFKN 등을 통해 NBA 중계를 보고 메모하면서 공부하실 정도였습니다. 당시에 그런 지도자가 얼마나 계셨을까 싶어요. 어쨌거나 그러다보니 송도고 출신중에는 대학에 진학해서 한참동안 적응을 못하는 케이스도 꽤 많았다고 하더라고요. 저역시 그랬으니까요.
Q.적응을 못한다고요?
아, 끝내 적응을 못했다는 것은 아니고요. 다른 환경에 잠시 동안 혼란을 겪기도 했다는 말이죠. 선생님의 모토는 ‘즐거운 농구’에요. 때문에 제자들은 다른 학교에 비해서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자율적인 농구를 실컷 즐겨요. 그러다가 그렇지 않은 곳으로 가게되면 아무래도 처음에는 좀 힘들겠죠. 분위기뿐만이 아니에요. 선생님께서 추천해주신 다양한 기술을 대학무대에서 쓰게되면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기술을 쓰는거냐’, ‘겉멋만 잔뜩 들어가지고…, 기본기부터 충실해라’하고 혼내는 지도자도 적지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죠. 다들 추구하는 농구가 다르니까요. 서상철, 유희형, 김동광, 이충희, 정덕화, 강동희, 신기성, 홍사붕, 김승현, 김현중 등 선생님이 어떤 분이셨는지는 제자들의 면면만봐도 느낌이 오지않을까싶어요.
Q.한양대 감독님 덕분에 농구를 시작했는데 대학은 고려대로 갔어요.
휴…, 사실 그렇지않아도 그 문제로 마음고생이 상당히 심했습니다. 약속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분 때문에 농구선수의 길로 발을 들여놓게 됐고 다들 당연스레 한양대로 갈 것이라 생각했나봐요. 사실 어린 시절인지라 그 문제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부모님께서 고려대를 추천하셨고 그대로 따랐을뿐이죠. 하지만 후폭풍이 꽤 있었죠. 김감독님께서도 당연히 서운하고 화가 나셨을 것이고요. 배신자 등 여러 가지 뒷말이 돌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죠. 전규삼 선생님께서도 ‘이건 좀 아니지않냐’라면서 뭐라고 하셨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인지라 그대로 고려대를 택하게 됐습니다. 아마도 제가 고려대에서 펄펄 날아다녔으면 두고두고 회자됐을 것이 분명합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부상에, 슬럼프까지 겹치면서 주전 경쟁에서 밀렸고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못했어요. 덕분에 당시 일은 사람들 뇌리 속에서 서서히 잊혀지게된 듯 싶어요. 웃픈 일이죠.(웃음)
Q.부상은 그렇다쳐도 몸이 회복된 뒤에도 활약이 저조했어요.
그러게요. 여러 가지 이유가 겹친 것 같아요. 일단 앞서 언급한데로 송도고에서 즐기는 농구에 완전 적응해있다가, 완전히 달라진 분위기 자체에 적응하기가 쉽지않았어요. 그 시절에 농구했던 분들은 다들 비슷하게 느꼈겠지만 사실 농구 자체보다 선후배관계, 합숙훈련, 엄격한 규율 등 다른 부분이 더 힘든 부분도 많았거든요. 저역시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거기에 감독님은 왜 그렇게 무서웠던지…, 당시 박한감독님이 계셨는데 특별히 저한테만 무섭게한 것이 아님에도 앞에만 서면 그냥 얼어붙었던 기억이 나요. 지나치게 긴장하다 보니까 될 것도 안되는거죠. 선수의 플레이에 자신감이 끼치는 영향은 굉장히 크잖아요. 더욱이 저같이 구력이 짧은 케이스는 더더욱 그렇고요.
Q.그렇다면 고려대로 간 것은 득보다 실이 많았네요?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세상사 일방적인 득도 없듯이 일방적인 실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엄격한 규율이나 분위기같은 경우 고려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거든요. 약간씩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당시 다른 대학들도 비슷했던 것으로 알고있어요. 다른 대학을 갔다고 이전 송도고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었죠. 부상에 관한 부분 역시 마찬가지고요.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극과 극 분위기를 다 겪어본 것도 지도자 생활을 하는데는 큰 도움이 된 듯 싶어요. 지도자가 추구하는 교육의 방향을 떠나 일단 다 알고 느낄 수 있으니까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힘도 당시에 많이 키웠나갔고요.
“스스로 원해서 시작한 농구, 명분이 동아줄이 됐죠”
Q.운동능력이 좋은 편이었다고 들었어요.
탄력, 순발력, 반사신경 등 전체적인 운동능력은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어찌보면 부족한 스킬에도 불구하고 저보다 큰 선수들과 경합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고요. 그런 부분을 감안했을 때는 농구를 늦게 시작한 것이 여러모로 아쉽게 느껴져요. 어차피 할 것 남들처럼 초등학교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중학생때부터라도 했다면 어떻게 바뀌었을까 싶기도 하고요. 학창시절의 1년은 성인이 되어서의 1년과 또 다르잖아요. 더불어 기술적인 부분은 물론 멘탈적인 쪽에서도 더 강해졌을 듯 싶어요. 농구를 늦게 시작한데다 처음 공을 잡은 곳이 송도고였잖아요. 어찌보면 대학교에 올라가서 적응하기 쉽지않았던게 당연해 보이기도 해요. 만약 중학교 혹은 초등학교까지 내려가서 좀더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면 견디고 적응하는 힘도 강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인지 사이즈나 운동능력 등 기본적으로 타고난 강점은 있는데 농구를 늦게 시작해서 경험이 부족한 친구들을 보면 아무래도 눈길이 좀 더 가더라고요. 경험만 쌓이고 다듬어진다면 더 잘할 수 있는게 보이거든요. 그래서 ‘자신있게 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아무래도 당시에 제가 부족했던 부분인지라 자신감의 중요성을 더 절감하기 때문이죠.
Q.스스로 멘탈이나 적응력이 아주 좋은 편은 아니었다고 밝혔지만 학창 시절을 거쳐 프로선수 생활까지 했다는것 자체가 어느 정도의 성실함을 보장하는 듯 해요.
하하핫… 그런가요. 사실 제가 지도자가 아니었다면 그럭저럭 스스로에게 후한 점수도 주면서 옛추억을 그리워하며 살았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다보니 과거의 저에 대해서도 좀 더 객관적이고 엄격하게 보게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그냥 그 누구도 아니고 그런 성향의 제자라고 봤을 때 어떻게 이끄느냐에 따라 발전 가능성도 달라질 듯 싶거든요. 마음이 흔들리고 힘들었을 때도 적지 않았음에도 버티고 또 버티면서 앞으로 나갈 수 있었던 데에는 ‘스스로의 의지로 시작한 농구’라는 부분이 가장 컸어요, 앞서 언급했다시피 부모님은 제가 운동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않으셨어요. 제가 하고싶다고 고집부려서 시작한 농구인지라 힘든 상황이 와도 ‘못하겠어요’, ‘그만할래요’등의 말을 할 수가 없는거에요. 힘들다고 징징거릴 수도 없고요. 그래서 무엇인가를 할 때는 본인 의지가 가장 중요한가봐요.
Q.스스로 만든 명분에 갇히셨군요?
그럼 셈이죠. 비단 의지같은 부분뿐 아니라 살다보면 울컥해서 그냥 때려치고 싶을 때도 있잖아요. 특히 운동한 친구들은 피가 뜨거운 부분이 많아서 아무리 성격이 좋다고해도 순간적으로 감정이 격해지는 느낌을 종종 받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 또한 타의에 의해서 농구를 시작했다면 적어도 몇 번 정도는 ‘에이! 나 안해’그랬을 공산이 큽니다. 하지만 아쉽게도(웃음) 제가 한다고했던 농구입니다. 누구에게 하소연을 하고 어떻게 안한다고 할 수가 있겠어요. 결과적으로는 잘됐지만 당시에는 정말 끙끙 앓을 정도로 명분에 갇혀버린 적도 적지 않았습니다.
Q.그래도 그 명분 덕에 농구 팬들에게 이름을 알릴 수 있었잖아요.
그렇죠. 어쨌거나 제가 하고자했던 농구니까 순간의 감정이나 변덕 등을 추스르고 끈질기게 갈 수 있었고 그런게 쌓이고 쌓이면서 선수로서의 기본 멘탈이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어요. 좋을 때는 더더욱 농구가 좋아졌고요. 기본기가 부족한 상태에서 제가 어필할 수 있는 것은 냅다 뛰어다니는 것 밖에 없었어요. 정교한 슛도, 다양한 기술도 갖고 있지 못했으나 남이 슛 쏜 것 뛰어들어가서 잡고 혹은 슛 못쏘게 따라다니면서 묶어버리고…, 그런 플레이도 재미있더라고요. 코트를 바라보고 있으면 제가 뛰어야 할 길이 보여요. 빈공간은 빈공간데로 점령하고, 혹은 누군가 그곳에 서있으면 몸싸움을 해서라도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하는거죠. 리바운드, 스크린 이런 것들은 기본적으로 자리다툼아니에요. 남보다 빨리 좋은 자리를 확보해야만이 그 다음 플레이가 수월해지죠. 그렇게 뛰고 또 뛰고 부딪히고 또 부딪히다보니까 어느새 조금씩 이름이 알려졌습니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쪽을 죽어라 파고들어서 했을 뿐인데 그런 모습을 주위에서는 좋게 봐주시더라고요. 팀에 한둘 정도는 이런 살림꾼 스타일이 필요하잖아요.
“지금 생각해도 초창기 나래는 정말 신바람나는 팀이었습니다”
Q.1994~95 농구대잔치에서는 서장훈에 이어 리바운드 2위를 차지하기도 했어요. 단신으로서 리바운드를 잘 잡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요?
아 그랬나요? 저는 모르는 사실이라. 어쨌든 2위라도 당시 쟁쟁한 선수들 사이에서 선방했던 것 같네요. 서장훈 선수야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는 레전드 빅맨이잖아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갖춘, 그 정도 사이즈에 기술까지 겸비한 센터가 당시에 뛰었으니 얼마나 무시무시했겠어요. 그 다음으로 리바운드를 많이 잡았다고하니 저로서는 영광이네요. 사이즈, 구력, 기술 등 뭐하나 변변하게 내세울게 없던 제가 리바운드를 많이 잡을 수 있는 노하우는 딱히 없었어요. 그냥 단순했던 것이 좋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어요. 열심히 뛰고 부딪히고 어찌보면 기본에 충실했던게 그나마 비결이라면 비결이었겠네요.
Q.한국산업은행에 입단한 것도 대학시절 입지가 밀린 탓도 있을 듯 싶어요.
그렇죠. 대학 시절을 그저 그렇게 보내고 나니까 앞날이 캄캄하더라고요. 활약이 좋았던 선수들이야 현대, 삼성, 기아 등 명문팀에서 서로 오라고 했겠지만 저는 상황이 완전 달랐죠. 팀을 고른다는 것은 말도 안되고 ‘어디서든 제발 불러줬으면’하는 마음 밖에 없었습니다. 상대적으로 금융권팀의 장벽이 낮았지만 ‘거기라도 갈 수는 있을까?’싶었어요. 다행히 산업은행에서 관심을 보였고 불러줄 때 얼른 가야겠다싶어서 두말않고 넙죽 받아들였던 기억이 납니다. 결과적으로는 더 잘됐던 것 같아요. 금방 주전자리를 차고 주전 파워포워드로 뛸 수 있었으니까요. 어쨌거나 선수층이 두터운 팀같으면 기회가 주어졌을까도 싶고 자칫 경쟁에서 밀리며 조기은퇴할 가능성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Q.팀 분위기는 어땠나요?
분위기는 좋았습니다. 선배님들도 잘 챙겨주셨고 팀에서도 많은 배려를 해줬어요. 제가 거쳐온 학교로 비유하면 고려대보다는 송도고에 더 가까웠다고보는게 맞을겁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금융권팀은 농구도 농구지만 향후 사회 생활에 그 이상으로 비중을 두고 있었어요. 실제로 오전에는 은행 업무 보고 오후에 농구 연습을 하는 등 은행원과 선수 사이를 오가는 생활패턴이었죠. 미래까지보면 장점이 많았던게 금융권팀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끔은 자신이 겪지 않은 쪽의 인생이 궁금해질 때도 있잖아요. 만약 산업은행에서 선수생활을 하다가 프로행을 택하지않고 계속 은행원으로 있었다면 직책은 어디까지 올라갔으며 얼마만큼의 연봉을 받았을까 등이 궁금해질 때도 있어요. 물론 선수의 길을 간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농구를 했던 이로서 프로에서 어느 정도 뛸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고 기쁜 일이었죠. 은행원에 대한 상상은 어디까지나 순수한 호기심일뿐입니다.(웃음)
Q. 프로 원년 약체로 꼽혔던 나래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챔피언결정전까지 진출합니다.
맞습니다. 돌풍이었죠. 말씀하신데로 원년에 나래가 약체로 꼽혔잖아요. 금융권팀을 이어받아 창단한 이유가 컸을거에요. 하지만 금융권팀이라고 다 못하는 선수만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당시 저희팀에도 정인교라는 최고의 슈터가 있었고 기업은행 쪽에는 김상식, 이민형이라는 국가대표급 콤비가 팀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선수층이 얇을 뿐 잘하는 선수들은 있었죠. 다만 잘하는 일부 선수에게 전력이 쏠리는 바람에 선수층 탄탄한 실업팀을 만나면 잘싸우다가도 질 수밖에 없었던거죠. 그런 상황에서 외국인선수 제도는 전력평준화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코트에서 뛰는 다섯명 중에 2명을 외국인선수로 채울 수 있었던지라 그런 방식을 통해서 기존 실업강호들과 경쟁이 가능해졌죠.
Q.제이슨 윌리포드와 함께 트윈타워를 이루어 챔피언결정전 준우승의 성적을 내는데 공헌을 했어요. 원년 시즌 수비 5걸에도 이름을 올린 것을 보면 수비 등 궂은일에 힘을 많이 쏟았을 듯 싶어요.
그래야했죠. 제가 할수있는게 그런 것이었고 팀에서도 당연히 그런 플레이를 원했으니까요. 팀내 주득점원이었던 칼레이 해리스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에너지가 넘치는 선수였어요. 악동기질, 독불장군 스타일로 인해 다루기가 쉽지않았으나 득점 능력 만큼은 확실했죠. 워낙에 자신감이 넘치는지라 말도 안되는 자세로 슛을 쏘기도하고 그랬는데 문제는 그러한 공격 조차 성공률이 상당했다는거에요. 거기에 윌리포드는 주전 센터로서 포스트 장악력은 물론 내외곽 공격이 모두 가능했습니다. 둘로 인해 생긴 빈자리에서는 정인교의 3점슛이 불을 뿜고요. 상대팀 입장에서도 참 막기 까다로웠을거에요. 그런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열심히 수비하고 리바운드에 참여하는 것이었죠.
“좋은 팀 분위기는 여러 가지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Q.팀 분위기도 무척 좋았던 것으로 기억되요.
좋았죠. 다들 혹평일색인 상황 속에서 우리끼리 똘똘뭉쳐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으니까요. 당시 나래가 잘나갈 수 있었던 비결은 잘 뽑은 외국인선수들의 위력도 컸지만 그와 더불어 선수들간 분업화가 잘됐다는 부분도 빼놓을 수는 없을거에요. 하나같이 궂은 일을 소홀히하지 않았고요. 만약 국내선수 중 누구하나 삐딱선을 타고 무리하게 욕심을 내는 등의 플레이를 했다면 그런 성적이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당시 최명룡 감독님께서 팀을 참 잘만드셨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잘나가는 팀을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분위기가 참 좋아요. 그 속에서 없던 힘도 생겨나고 그러는 것이죠. 분위기가 좋으면 선수들 표정이 밝아지고 조금씩 서로 양보하고 배려해주면서 조직력 또한 탄탄해집니다.
Q.장신 국내빅맨도 막기힘든 기아의 클리프 리드-로버트 월커슨을 언더사이즈 입장에서 상대하기가 힘들었을 듯 싶어요.
힘들었죠. 원년 외국인선수 조합 중에서도 최고의 트윈타워로 불렸잖아요. 월커슨이야 센터니까 그렇다쳐도 리드같은 경우 신장이 저랑 비슷했거든요. 한데 탄력의 질 자체가 달랐어요. 정말 엄청나게 점프하고 뛰어다녔어요. 저역시 국내선수 중 운동능력 하나만큼은 안꿀린다고 생각했지만 이거 뭐…, 직접 맞상대해보면 또 다른 세상을 경험하는 느낌이에요. 이래서 농구하면 흑인하는가 싶기도하고. 물론 리드는 그러한 흑인 중에서도 신장대비 포스트 장악력은 상급이지 않았나 싶어요. 물론 항상 외국인선수만 상대한 것만은 아니에요. 하지만 당시 기아의 무서운 점은 어떻게 매치업이 되어도 유리한 포지션을 만들어냈다는 점이 아닐까싶어요. 리드가 나가고 들어오는 국내선수가 다름아닌 국가대표 빅맨 김유택 선배였으니까요.
Q.1998~99시즌을 앞두고 주희정과 함께 삼성으로 트레이드됩니다. 정든 팀을 떠나게되어서 충격이 컸을 듯 싶어요.
실업시절에는 싫든좋든 내가 처음에 들어온 팀에 뼈를 묻는다는 개념이 강했어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트레이드도 흔치않았고 그마저도 개인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프로는 달랐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조건만 맞으면 바로바로 트레이드가 실행되었어요. 프로의 냉정함과 합리성이 동시에 느껴지는 대목이었죠. 솔직히 말하면 가족같은 분위기의 팀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어요. 더욱이 당시는 실업의 연장선 느낌이 강했던지라 선수들도 대체적으로 트레이드를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고요. 하지만 비즈니스잖아요. 받아들여야 될 것은 받아들여야죠. 아쉬운 것은 삼성에 가서는 인상적인 활약을 하지 못했다는 점인데, 대신 코트밖에서 분위기 메이커 등 고참 역할을 하려고 나름 노력했고 그 와중에 우승까지 경험하며 기뻤던 기억도 납니다. 그렇게 쌓인 이런저런 경험들이 지도자를 하면서 아이들을 가르키고 이해하게되는 원동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Q.마지막으로 여전히 농구인 강병수를 기억해주는 팬들에게 인사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나 보여준 것에 비해서 과분한 사랑을 받은 사람같아요. 너무너무 감사하고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심하지 못한 성격 탓에 표현 등에서 서툴렀던 것이 후회스럽기도 하지만 마음 속에서는 한시도 감사한 마음을 잊지않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같은 사랑을 가슴에 품고, 지도자로서 제자들에게 나눠주려고 합니다. 팬분들에게 기쁨주고 사랑받을 수 있는 좋은 새싹들을 길러내기위해 늘 최선의 노력을 아끼지않겠습니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KBL 제공, 본인제공
기사제공 점프볼
김종수 oete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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