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크슛에 웃고 산타기 훈련에 울었습니다”
기사입력 2022.12.06. 오전 09:01 최종수정 2022.12.06. 오전 09:01
[김종수의 농구人터뷰(64)] '비운의 덩크머신' 허효진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훈련이 힘들다고는 하지만 온몸을 바쳐서 저와 여동생을 키우는 어머니의 희생에 비할바는 아니었죠. 어머니와 여동생을 위해서라도 정말 잘하고 싶었습니다”
이제는 은퇴한지 10년이 지난 허효진(38‧190cm)을 기억하는 팬들은 많지 않다. 마니아 팬들 사이에서는 '기대만큼 크지 못한 아쉬운 유망주', ‘덩크슛이 기가막혔던 선수’ 등으로 기억될지 모르겠지만 일반 팬들 사이에서의 그의 인지도는 높지않다. "허효진? 어디서 들어봤는데…"라면 다행이고 '그게 누군데?'하는 이들도 적지않을 듯 싶다.
물론 그런 케이스는 허효진 뿐만이 아니다. 새로운 스타가 끊임없이 나오는만큼 그렇게 잊혀져가는 선수들은 한둘이 아닐 것이다. 잊혀지지 않을 만큼 특출나게 잘했거나 오랜시간 롱런하면서 누적기록을 쌓지 않은 이상 팬들의 기억회로를 잡아두기는 쉽지않다. 아님 ‘수비도 역대급, 3점슛(반대 의미로)도 역대급인 신명호처럼 눈에 띌만한 본인만의 확실한 특징이 있어야한다. ’박장법사‘ 박도경처럼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현역 때보다 더 유명해지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다.
프로에서의 통산 3시즌 동안 평균 3.01득점, 1.11어시스트, 1.52리바운드에 그치고 말았던 허효진이지만 당시 그에게 기대를 거는 이들은 적지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랭킹 1위로 평가받은 초고교급 선수였을 뿐 아니라 중앙대 진학후 부상으로 1년을 휴학했음에도 2006 농구대잔치 MVP를 받는 등 재능만큼은 확실했다.
상당수 지도자들 사이에서 허효진은 ’덩크슛을 가장 잘하던 고교생‘으로 회자되고 있다. 또래들과는 차원이 다른 탄력을 바탕으로 실전에서 슬램덩크를 구사했고 앨리웁덩크에도 능했다. 덩크슛한 공이 림을 맞고 퉁기자 그 공을 다시 잡아서 원핸드 덩크슛을 꽂아 넣었다고 한다. 덩크슛을 시도하다가 상대가 팔을 쳤지만 끝내 성공시키며 바스켓굿을 받기도 했다. 파워풀한 돌파를 앞세워 상대 수비진을 유린한 것은 물론 외곽슛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확실한 에이스로 활약하며 개인 성적은 물론 팀 성적까지 함께 잡았다. 고교 3년 동안 6개 대회에서 우승 3회, 준우승 2회, 4강 1회로 펄펄날았다.
“누구와 붙어도, 어떤 팀을 상대해도 절대 질 것 같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제 농구 인생의 시작이라고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때가 전성기로 남게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어쨌거나 제가 부족했던 탓입니다. 잘나가던 학창시절을 그리워하며 위안 삼고 싶지는 않습니다. 프로에 진출한 선수중 유망주 소리 듣지않은 선수가 있었을까요. 다들 또래들 중에서 돋보였기에 농구로 대학도 갔고 프로에서까지 지명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에 대해 후회해봤자 의미는 없겠지만 좀더 현명하게 몸관리를 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은 간혹 들더라고요”
대다수 유망주들이 날개가 꺾이는 가장 큰 원인은 부상이다. 허효진 역시 그랬다. 치명적인 무릎부상 이후 예전의 운동능력을 상당부분 잃었고 이후 발목 등 다른 부분까지 과부하가 걸리면서 도미노처럼 건강 밸런스가 무너져버렸다. 이는 자신감 상실 등 멘탈적인 부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역대급 덩크 머신이 될 수 있었지만 앞에 비운이라는 글자가 붙어버린 허효진을 만나 아쉬웠던 지난 얘기를 들어보았다.
“최근 유소년 농구는 날이 갈수록 체계화되고 발전하고 있습니다”
Q.농구교실을 운영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아…, 충청남도 아산시에서 리틀 썬더스 농구교실에 있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운영을 하고있는 것은 아니에요. 원장은 아니고요. 여기서 코치로서 농구를 가르치는 역할을 하고 있죠. 아이들이 시합나가면 지도하고 이끄는 것 포함해서요. 이렇게 말하니까 리틀 농구교실 형태로만 가는 것 같은데 농구를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모두 환영입니다. 예전에는 성인반도 있었다고 하던데 지금은 중3 그 정도까지 가르치고 있어요. 아무래도 농구교실까지 다니면서 배우려는 성인은 많지않으니까요.
Q.그래도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시는 것 같아요.
안정적이다는 의미를 어디에 기준점을 두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직장이라고는 생각합니다. 모든게 다 상대적이고 또 예외도 있겠으나 일반적으로, 중고등학교에서 엘리트 선수들을 가르치는 코치님들보다는 안정적이지 않을까 싶어요. 어쨌거나 농구를 했던 사람으로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시합도 데리고 다니는 등 농구 관련 일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Q.요새 스킬트레이닝이 뜨고있는데 관심없으신가요?
말씀하신데로 요즘은 스킬트레이닝 시장이 상당히 커진 듯 싶더라고요. 전문업체는 물론 선수출신도 많이 뛰어든 상태고요. 개인 기술의 중요성이 점점 커지는 시대잖아요. 학생들은 물론 현역 선수까지도 다양하게 접하고 있는 것 같아요. 저도 하기는 해요. 하지만 제가 따로 뭔가를 차렸다거나 객원으로 나가는 형태는 아니고요. 배우고 싶으면 이곳으로 찾아오라는 정도죠. 개인레슨도 하고 있고요. 많지는 않습니다.
Q.아이들을 데리고 어떤 시합을 나가시는 것이죠?
크고 작은 대회를 모두 포함시키면 나갈 수 있는 시합은 꽤 되요. 단 저같은 경우는 삼성측으로부터 썬더스라는 명칭을 받아왔으니까 어떤 시합을 출전하든 간에 농구교실 이름을 팀명처럼해서 가는거죠. KBL에서 주관하는 큰 대회가 있거든요. 거기같은 경우는 저희처럼 소속된 팀만 나갈 수 있습니다. 최근 유소년 농구환경이 좋아졌다고 느끼는게, 일단 시합이 상당히 많아요. 1박2일 정도면 끝나는 일정인지라 계속해서 다양한 시합에 참여하는게 가능해지죠. 더욱이 초등학교 기준으로 학교 농구부같은 경우는 시합을 나가면 아무래도 고학년들 위주로 뛸 수밖에 없어요. 이런저런 이유를 떠나서 상대팀에서 고학년으로 나오면 이쪽도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요. 여기 시합들은 조금 달라요. 초등학교 2학년 정도부터 시합이 있어요. 각학년별로 다 있는 것이죠. 아주 어릴 때부터 실전 속에서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점은 큰 메리트가 아닐까싶어요. 그러다가 또래 중에서 아주 잘하는 친구가 있으면 학년을 올라가면서도 출전할 수도 있고요. 물론 반대로 형이 동생들 시합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히 안됩니다.(웃음)
Q.어찌보면 무조건 엘리트선수로 가는 것보다 유소년을 먼저 경험하는 쪽이 더 좋을 수도 있을 듯 싶어요.
요즘 트랜드이기도하고 개인적으로도 그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키가 크거나 운동신경이 좋아보이면 바로 엘리트 쪽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 안에서 잘 적응해서 살아남으면 계속해서 나아가는 것이고, 아니면 중간에 그만두는 등 안좋은 결과도 나오고 그랬죠. 일단 초등학교 때는 즐기면서 농구하는게 최고가 아닐까 싶어요. 또래들과 웃고 떠들고 경쟁하면서 숨은 재능까지 발견하거나 아니면 선수부로서의 길이 자신과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 다른 쪽을 택하는 아이들도 있을 것이고요. 이미 중학교 올라가서 농구부에 들어가면 그렇게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적을겁니다.
“축구 선수를 했더라면 어땠을지 궁금하기는 합니다”
Q.농구공을 잡게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무학초등학교 6학년 말쯤에 얘기가 나오기 시작해서 단대부중으로 진학하면서 농구를 하게됐어요. 사실 저도 제가 농구를 하게 될 것이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전까지는 육상을 했었거든요. 일단 뛰는 것을 어린시절부터 잘했으니까요. 당초 목표는 체육중학교에 진학해서 축구를 할 생각이었어요. 하지만 육상부 선생님이 ’농구를 한번 해보는 것은 어떠냐?‘고 권유하시게 된거죠. 사실 저는 생소하기만 했는데 선생님께서 어머니도 만나 뵙고 이런저런 절차가 진행되면서 자연스럽게 농구공을 잡게 됐습니다. 키도 크고 하니까 축구보다는 농구가 어울리지 않겠냐고 다들 말씀하신거죠. 나중에 알고보니까 중학교 코치선생님 장인어른이 무학초 교장선생님이셨더라고요. 자연스럽게 연결됐다고 보는게 맞겠죠.
Q.‘축구를 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도 가끔 들었을 듯 싶어요.
그렇죠. 아무래도 하고 싶었는데 안하게되서 더 그런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달린다는 점이 비슷해서인지 농구하기 전에 축구를 경험했거나 혹은 축구 쪽으로 갈 뻔 했던 케이스도 적지않다고 알고 있어요. 저같은 경우, 농구선수로서 만족할만한 마무리가 안됐다보니 ‘혹시…’하는 생각도 들고 그랬죠. 하지만 축구를 하기에 당시 기준으로는 너무 크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도 큰 사이즈겠지만 그래도 최근에는 저같이 크면서도 잘 달리는 축구선수들도 속속 나오더라고요. 아마 축구를 했으면 큰 키를 살려 골키퍼를 하는 쪽도 잘어울렸을 듯 싶어요.
Q.농구를 시작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사실 어린 나이였던지라 처음에는 모든게 생소하고 힘들었죠. 하지만 역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새벽마다 쥐가 나는 것이었어요. 허벅지, 종아리 등에 가해지는 고통이 장난아니었죠. 그때 제가 키는 막 크고 있었는데 마른 체형이었거든요. 먹는 것도 부실했지만 그것보다는 운동량이 갑자기 늘어난게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갑작스럽게 과부하가 걸리다보니 몸이 버티기가 쉽지않았나봐요. 제가 가지고있던 근육량이 100이라면 120을 써버리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새벽에 자다가 쥐가 나면 그야말로 죽을 맛이에요. 당황스럽고 고통스러워서 어찌할바를 모르겠더라고요. 제가 소리를 지르면 어머니가 달려와서 도와주고는 했죠. 중학교 1, 2학년 때는 그런 경우가 다반사라 정말 힘들었어요. 그러다가 단련이 됐는데 3학년 때는 쥐가 나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더라고요.
Q.고등학교때 랭킹 1위였다고 하더라고요.
확실하게 뭔가로 정해지는 부분은 아닌지라 제가 부동의 1위였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때는 기량적으로 계속해서 발전했고 주변에서도 좋게봐주시던 시기인지라 자신감은 넘쳤던 듯 싶어요. 운동선수에게 자신감은 정말 중요한 요소잖아요. 몸도 성장하고 마음도 단단했던지라 플레이에도 긍정적으로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또래 중에서도 잘하는 친구들 은 많았어요. 잘 알려진 선수들을 꼽아보자면 김학섭, 주태수, 전정규 등이 먼저 떠오르네요. 사실 중학교 2학년때까지는 농구를 계속해야되나 고민이 많았습니다. 스타팅 멤버로 자주 나서기는 했으나 냉정하게 말해서 실력은 팀에서 4~5번째 정도였으니까요. 그 정도 가지고 고등학교를 가면 살아남기 힘들 것 같았습니다.
Q.중학교 2학년 때까지라는 말을 한 것으로 봐서는 3학년때부터 눈에 띄게 성장이 이뤄진 것 같아요.
맞습니다. 3학년에 들어서서 고등학교 형들이랑 웨이트 트레이닝하고 훈련도 함께 한 것이 큰 도움이 된 듯 싶어요. 웨이트를 하면서 몸에 힘이 붙고 그로인해 몸싸움 등에서 밀리지않게 된게 경기력에 큰 영향을 줬죠. 저보다 상위레벨에 있는 형들과의 훈련도 경험이나 이런저런것들에서 플러스로 작용했고요. 거기에 더해 꾸준히 개인훈련을 한 것이 빛을 본 듯 싶어요. 사실 스포츠는 단순해요. 정말 크게 재능의 차이가 나지않는 이상 더 열심히 하는 쪽이 치고나가거든요. 팀 훈련이야 어차피 다같이 함께하는 것이잖아요. 자신의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느끼고 개인훈련을 통해 채워나가고 발전시키려는 자세가 중요해요. 당장은 티가 안날지 몰라도 쌓이다보면 그렇지 않은 이들과 격차가 많이 생기게 되더라고요. 저 역시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컸던지라 개인 훈련을 정말 많이 했어요. 제가 부족한 것을 보강하는 것은 당연하고요. 남들이 잘하는 기술 등을 눈여겨봤다가 나중에 혼자있을 때 연습하면서 내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잘되더라도 정말 미친 듯이 파고 또 파면 나중에는 비슷하게라도 됩니다. 이같은 노력이 결과로 나타난 시기였고 그로인해 자신감도 부쩍 얻게됐죠.
“덩크슛은 점프도 중요하지만 타이밍의 예술입니다”
Q.고교시절 덩크슛으로 유명했어요.
그래도 그런 추억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에요. 그때는 덩크슛이 성공될 때마다 기분이 좋아져서 이것저것 시도해보던 시절이거든요. 고등학교에 올라간 이후 감독님, 코치님께서 웨이트 트레이닝을 강조하셔서 정말 많이 시키셨어요. 단순히 팔다리만 강화시키는게 아닌 복근운동, 허리 기립근 운동 등도 열심히 했는데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부터 몸이 좋아지는게 스스로도 느껴지더라고요. 점프라는게 단순히 다리힘으로 팍 차고 올라가는게 아니거든요. 전체적으로 신체 밸런스가 좋아야 서로 힘을 받으면서 높이 뛸 수 있어요. 당시가 그랬던 것 같아요. 더불어 런닝도 중요합니다. 런닝은 모든 운동의 기본이죠. 체력이 좋아지는 것은 물론 꾸준히 해줘야 일정한 페이스로 달릴 수 있고 다른 능력치도 상승합니다. 런닝은 정말 정직합니다. 하루한 사람하고 일주일 한사람의 차이가 확 느껴지거든요. 어쨌거나 몸이 강해지고 신체능력도 좋아지면서 점프력도 부쩍 늘었습니다. 덩크슛도 가능하게 됐고 기본적인 기술에 익숙해지다보니 안해본 것들도 계속해서 시도하게 됐죠. 해보고 싶은 덩크슛이 있으면 몇 번 연습해보면 비슷하게 되고 그러던 시절입니다.
Q.덩크슛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그냥 신났어요. 하는 저희도 보는 관중들도 같이 즐겼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같은 골밑득점이라도 레이업슛보다는 덩크슛이 더 눈길을 끌 수밖에 없잖아요. 사실 실제 경기에서는 덩크슛을 많이 하지는 않았어요. 경기전 몸풀 때 자주 시도했죠. 저희 학교같은 경우 마무리를 덩크슛으로 하는 친구들이 좀 있었어요. 멋진 덩크가 나오면 관중석에서도 함성이 터져나오고 선수도 좀더 에너지레벨이 올라가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일종의 경기전 이벤트나 퍼포먼스같이 되는 것이죠. 그러다보니 좀더 멋있는 덩크를 보여주고 싶은 욕심도 생기더라고요. 사실 아무리 많이보고 연습해도 NBA에서 뛰는 흑인선수들같이 공중에서 한번 접어서 덩크슛을 때려박고 그런 플레이는 어려워요. 대신 다른 쪽에서 기교를 부려보려고 했죠. 예를 들어 앨리웁같은 것요. 앨리웁을 성공시키려면 점프력도 중요하지만 타이밍을 잘 잡아야해요. 이것저것 배워나가면서 시도했던 질풍노도의 시기였습니다.(웃음)
Q.부르는 곳이 많았을 듯 싶은데 최종 선택은 중앙대였습니다.
사실 큰 의미는 없었습니다. 저같은 경우 어머니께서 생계를 책임지고 계신 관계로 경기장에도 잘 찾아오지 못하시고 다른 또래들에 비해서 케어를 거의 못 받았어요. 그 때문인지 중고등학교 선생님들이 더 신경써주시고 관심도 많이 가져주셨어요. 어떤 면에서는 아버지 역할도 일정부분 해주셨죠. 그래서 늘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었고 대학진학시에도 선생님께서 추천해주시는 곳으로 갔어요. 이것저것 재고 말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부상악몽…, 더 신경썼어야 했습니다”
Q.앞서도 언급했지만 어머님께서 정말 고생을 많이하신 것 같아요.
휴…, 많이 하셨죠. 지금도 어머니 생각만하면 가슴이 먹먹합니다. 잘한 것은 거의 안떠오르는데 못한 것만 자꾸 기억나요. 저는 고향이 전라북도 부안이에요. 초등학교 2학년때 서울로 전학을 가게된 케이스에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머니께서 저와 여동생을 키우시려고 일자리를 찾아서 올라오게 된거죠. 아마 아버지가 계속 계셨더라면 태어난 부안에서 쭉 있지않았을까 싶어요. 운동부 등이 활성화되지 않은 지역인지라 어쩌면 다른 길을 가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게 다 운명같기도해요. 어머니께서 음식솜씨가 좋으세요. 처음에 막 올라왔을 때는 다른 사람 가게에서 이것저것 잡일을 하시다가 이후 직접 식당을 하고 계세요. 왕십리에 전주식당이라고 있어요. 백반부터 삼겹살, 닭도리탕 등 다양하게 팔고 계시죠.
Q.어머니께서 엄하게 키우셨다고 들었어요. 회초리도 자주 들었고요.
아무래도 아버지께서 안계신 관계로 더 신경쓰시고 엄하게 키우신 것은 맞는데 회초리는 자주 들지않으셨어요. 번거롭게 회초리를 따로 드시기보다는 그냥 손에 잡히시는데로…(웃음).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입장에서 다른 쪽으로 신경을 많이 쓰기 힘든 상황이다 보니 더 엄하게 하지않았나싶어요. 특히 어린시절부터 예의에 대해 많이 강조하셨어요. 나쁜말, 예의에 어긋한 행동 등을 할때면 여지없으셨죠. 그래서 제가 나쁜 쪽으로도 안빠진 것 같아요. 잠시 그럴 뻔한 적도 있었거든요. 하지만 어머니께서 워낙 어린시절부터 단호하게 가르치셨고, 더불어 제 개인적으로도 평생 희생하신 그 마음을 잘 알기에 잠깐의 유혹마저 뿌리칠 수 있었습니다.
Q.그래서 더 열심히 훈련하셨을 것 같아요.
그렇죠. 고생하고 계신 어머니와 하나 밖에 없는 여동생을 위해서라도 꼭 일등이 되고 싶었어요. 고등학교 때는 적어도 농구에 있어서만큼은 정말 자신있었어요. 덩크슛으로 유명했지만 가장 자신있었던 것은 일대일이었거든요. 경기에 나서면 동료들에게 옆으로 비키라고하고 제가 한구역을 맡아서 일대일로 득점을 성공시키는 경우가 많았어요. 한두명은 무조건 제낄 수가 있었으니까 두렵지않았습니다. 외려 수비수들이 저를 막느라 고생했죠.
Q.대학와서 부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무릎 부상이 컸습니다. 한번 망가진 뒤로는 계속해서 말썽을 부리더라고요. 수술을 했어도 크게 달라지지않았고 그 뒤에는 건강한 무릎으로 경기를 뛴 적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어요. 중고등학교 때 정말 산을 많이탔는데 여기서 피해가 컸죠. 올라갈 때는 문제가 안되요. 말 그대로 체력, 근력운동이죠. 문제는 내려갈 때에요. 거기서 무릎이 많이 다치거나 연골을 상하게 되요. 최근에는 산타는 훈련을 해도 그 부분에 신경을 쓴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당시 선생님들을 탓하는 것은 아니에요. 같이 산을 탔어도 모두가 저처럼 무릎이 고장나지는 않았으니까요. 스트레칭도 그렇지만 하체운동에 더 신경을 썼어야 했어요. 보통 웨이트를 하면 하체 쪽부터 관리를 한다고 하잖아요. 저는 하체운동을 많이 하지 않았어요. 상체 중심으로 웨이트를 했죠. 어린 마음에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에 더 빠져들었던 거죠. 지금도 후회하는 부분입니다. 고등학교 때도 무릎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크게 티는 나지않았어요. 점프를 많이 못뛰게 되었어도 기술로서 이겨낼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대학부터는 다르잖아요. 잘하는 선수도 많고 경기수준도 다르고.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 견디어낼만한 상황이 아니었죠.
Q.대학에 올라온 후 휴학한 것도 수술 등 무릎을 고치기 위함이었죠?
그렇죠. 어지간하면 칼을 대지 않아야 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수술 후 재활과정을 거친 후에도 몸이 제대로 올라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무려 일년 반을 쉬었거든요. 그러고나서 다시 농구공을 잡으니까 감각이나 여러 가지면에서 생소한거에요. 발전은 커녕 예전기량 조차 나오지못하니 당황스러움을 넘어 나중에는 절망에 가까운 마음까지 들더라고요. 멘탈도 흔들리면서 자신감까지 사라지고요. 그냥 다른 선수가 되어버렸습니다. 아픈 것은 한쪽 무릎인데 밸런스가 깨져버리고 나머지 부분에 과부하가 걸리니 양쪽 무릎이 모두 이상해지더라고요. 겨우겨우 몸상태를 끌어올려서 어느정도 컨디션을 찾은 것이 4학년때에요. 그때가 농구대잔치 MVP시절일거에요. 당시 김상준 감독님께서 기회도 주시고 격려를 아끼지 않는 등 많이 도와주셨어요.
Q.어쨌든 프로는 가야됐잖아요?
그렇죠.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프로는 무조건 가야했습니다. 아마 혼자였으면 멘탈이 흔들렸던 시점에서 그만뒀을지도 몰라요. 저보다 못했던 선수들이 건강한 몸으로 저보다 앞서 나갈때는 스스로에게 자책감도 들고 그랬습니다. 하지만 저만보고 온갖 고생을 하신 어머니가 계신지라 함부로 포기할 수도 없었죠. 사실 아무리 유급했다해도 동기들과 함께 드래프트를 신청하는게 맞았어요. 마침 2007년이 역대급 드래프트였거든요. 김태술, 이동준, 양희종, 박상오, 신명호, 이광재, 김영환, 함지훈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선수들이 많았거든요. 반면 그 전해는 경쟁이 좀 약했죠. 1라운드와 2라운드는 받게 되는 기회 자체가 달라요. KTF에 16순위로라도 지명된 것은 다행스럽게 생각하지만 이전 해였다면 순위가 당겨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Q.하위순번이나 2라운드에서도 성공사례가 있기는해요.
맞습니다. 저도 그런 사례가 되기위해 한 눈 안팔고 열심히 했죠. 고등학교 때처럼 화려한 개인기를 부리거나 높이 뛸 수는 없었지만 추일승감독님께서도 가능성을 보고 많이 키워주시려고했어요. 당연한 것이겠지만 수비부터 열심히하고 외곽슛연습도 많이했어요. 과거는 잊고 팀이 원하는 선수가 되어서 최대한 현역 생활을 길게 가고 싶었어요. 훈련도 정말 열심히했고요. 그래서인지 당시 언론기사들을 보면 제가 예전의 이름값을 되찾을 수 있을까라는 주제의 글들이 많이 보였던 기억도 나요.
Q.프로에 와서도 부상 악몽은 그치지않았어요.
무릎이야 안고가야 할 업같은 것이겠지만 뜻하지 않을 때 자꾸 부상이 발생했어요. 상무도 그래서 못갔거든요. 상무테스트 일주일 전에 발목을 심하게 다쳐서 목발을 짚고 갔습니다. 다행히 4급이 나와서 공익을 가기는 했지만 이래저래 아쉬움이 크더라고요. 전역 후에는 추일승 감독님도 그만 두신 후라 작은 기회조차 받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때 손을 내밀어주신분이 대학시절 은사셨던 김상준 감독님이세요. 감독님께서 ‘허효진이 안쓸거면 내가 데려가고 싶다’는 식으로 저를 삼성으로 끌어주셨는데 안타깝게 제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감독님은 얼마지나지않아 사령탑에서 물러나셨고요. 결국 저도 은퇴수순을 밟게됐죠.
Q.마지막으로 여전히 농구인 허효진을 기억하고 사랑해주시는 팬분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제가 사실 크게 유명한 선수는 아니었던지라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계시지는 않을거에요.(웃음) 하지만 그래도 알아봐주시는 분들을 만날 때는 남다른 기분을 느끼고는 합니다. 언젠가 부산을 갔더니 어떤 팬 분께서 아는체를 해주셨어요. 제가 부산에서 뛸 때 경기를 봤었다고 하시면서 이제는 본인 자녀가 농구를 한다고 하는데, 순간 가슴이 뭉클해지더라고요. 이제 추억이구나 싶기도 하고 팬분들 한분 한분의 소중함을 새삼 실감했죠. 그분들이 있었기에 제가 짧으나마 선수생활을 했던 것이 더 의미있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정말 선수라면 어떤 상황 어떤 위치에 있어도 팬 분 들에게 잘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큰 스토리가 아님에도 팬분들에게 예전 이야기도하고 근황도 전할 수 있는 자리 마련해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저는 주어진 자리에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글을 읽는 분들께서도 항상 행복이 넘치시고 좋은 일 가득하시기를 바랄께요.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KBL 제공, 본인제공
기사제공 점프볼
김종수 oete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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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현 막판 투입, 금메달 향한 마지막 승부수였죠 (2) | 2022.11.22 |
“심판하면서 세상의 욕이란 욕은 다 먹어봤죠” (2) | 2022.1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