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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은 가드였지만 센터빼고는 다 수비해봤어요”

농구인터뷰

by 멍뭉큐라덕션 2022. 12. 13.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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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지션은 가드였지만 센터빼고는 다 수비해봤어요”

기사입력 2022.12.13. 오전 09:01 최종수정 2022.12.13. 오후 01:28

[김종수의 농구人터뷰(65)] ‘필승 대기조’ 정윤숙

“포지션이 가드인 것은 맞았는데요. 사실상 포지션이 의미가 없을 때도 많았어요. 저것 하라면 저것하고, 이것하라면 이것하고…, 특히 수비같은 경우는 센터빼고는 다 막아봤던 것 같아요. 그냥 잠깐 나가서 버티어주는게 아닌 저보다 더 크고 힘센 선수들을 상대로 마음먹고 부딪히는거죠. 좋게 말하면 멀티플레이어, 그냥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잡일꾼이었다고나 할까요.(웃음) 3번까지는 그렇다쳐도 4번 수비는 어떻게 한거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해요. ”

장신가드로 한시대를 풍미했던 정윤숙(47‧176cm)은 자신의 현역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당시 기준 가드치고 큰편이었던 신장, 거기에 슈팅, 돌파, 패싱센스 등을 평균 이상으로 고르게 갖췄던 관계로 지도자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엄청난 활동량과 악바리 근성을 바탕으로한 수비에서 공헌도가 컸던지라 더욱 그랬다.

“신장도 신장이지만 가드와 빅맨은 만들어져온 과정 자체가 다릅니다. 기본적인 파워부터 차이가 커요. 한번 퉁 부딪힐 때마다 온몸에 전해지는 충격이 장난아니에요. 막을 수 있을까? 제 자신에게 의문이 생길 때도 간혹 있었죠. 그럴때는 그냥…, 아무 생각 안하면 됩니다. 에라 모르겠다! 악으로 깡으로하다보면 상대 선수도 버거워하게 되더라고요”

팀에 부족한 부분이 생길 때마다 0순위로 호출되던 선수인데다 농구대잔치 때부터 뛰어온 관계로 프로 커리어는 생각만큼 화려하지 않다. 그녀가 현대 그리고 금호생명, KB스타즈에서 남긴 기록은 정규시즌 통산 154경기에서 평균 6.66득점, 2.14어시스트, 3.66리바운드, 1.30스틸이다. 플레이오프에서도 25경기에 나서 6.24득점, 2.16어시스트, 3.64리바운드, 1.2스틸을 남겼다. 살림꾼 유형이었음을 감안하면 추가 점수를 더줘서 커리어를 판단해도 무방할 듯 싶다.

항상 화려함에서 빗겨간 것만은 아니다. 2003년 2월 25일 삼성전에서는 30득점을 폭발시켰으며 한달전인 1월 18일에는 친정팀 현대를 상대로 무려 8개의 스틸을 만들어냈다. 2001년 10월 태국 방콕에서도 있었던 제19회 FIBA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 국가대표로 뽑혀 나서기도 했다.

‘카카오톡 프로필을 보니 아들이 고등학교에서 야구를 하고 있는 것 같던데 농구를 시키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 않으세요?’라고 물었던 질문은 실수(?)였다. 아직까지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정윤숙의 아들은 고교야구 최고 선수 중 한명이다. 최근 천안북일고에서 휘문고로 전학을 간 김휘건이라는 투수로 현재 고교 랭킹 1, 2위권을 다투고 있다.

장신에서 찍어누르듯 던지는 최고 구속 140km대 후반의 페스트볼이 주특기로 완성도와 묵직함에서 프로무대에서도 즉시 전력감으로 통할 것이라 기대를 모으고 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주목하고있는 장현석에 살짝 가리고 있는 부분도 있으나 어차피 둘다 탑레벨이고 진검승부는 성인 무대에서 이뤄지기에 향후 누가 더 잘할지는 알 수 없다.

“큰 아이의 영향으로 농구만큼은 아니더라도 이제는 야구에도 꽤 박식해져가고 있는 듯 해요. 엄마니까요. 농구에 대한 아쉬움은 작은 아이가 풀어주기를 기대하고 있어요. 내년에 홍대부고 입학 예정인데 승부근성이나 성실함이 형을 많이 닮았습니다. 큰 녀석이 드래프트에서 높은 픽을 받을 공산이 큰데 작은 녀석도 부지런히 성장해 KBL드래프트에서 주목받는 선수로 컸으면 좋겠어요”

선수시절 전천후 악바리에서 이제는 두아들을 야구, 농구계 유망주로 키우고있는 정윤숙을 만나 그 시절 농구얘기와 그녀만의 스포츠 철학을 들어보았다.

 

“많은 아이들이 농구 그 자체를 즐기면서 애정을 가지게 하고 싶어요”

Q.춘천에서 농구교실을 운영한다고 들었어요. 언제부터 하고 있는 것인가요?

맞아요. 춘천에서 J.KIM 국가대표 농구교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7년 정도 된 것 같아요. 저는 마산출신이에요. 고등학교까지 마산에서 다녔죠. 춘천은 남편의 고향이다보니 터잡고 살게됐네요. 남편이 직업장교 출신이에요. 11년정도 복무하다가 전역했는데 대학교 시절까지는 농구를 했어요. 때문에 농구에 대해 통하는것도 많고해서 함께 의기투합해서 농구교실을 열게 됐죠.

Q.순수 취미반과 선수반으로 나뉘어져 운영되더라고요?

네. 처음에는 순수 취미반만 있었는데 이후에 선수반도 만들게됐어요. 여기에는 작은 아이의 영향도 커요. 작은 아이를 키우기위해 선수반을 만든 의미도 있어요. 대회에 출전하려면 어느정도 수준이 되야하고 그러니까 선수반을 만들어서 함께 성장시킨거죠. 본래는 큰 아이, 작은 아이 둘다 야구를 했어요. 큰 아이는 내년에 고3올라가는데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내고있어서 드래프트에서도 좋은 결과가 기대되는 상황이고요. 작은 아이도 재능은 있지만 어쩌다보니 이런저런 사정이 겹쳐서 야구를 그만두게됐어요. 다행히 신체조건도 좋고 본인도 흥미를 보여서 농구를 꾸준히 하고있는 상황이죠. 홍대부고 진학 예정인데 아직 엘리트쪽으로는 안갔고요. 저희가 데리고있으면서 함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그래도 부모와 함께 부담없이 재미있게 농구하다보니까 더 농구에 흥미를 붙인 부분도 있는 듯 싶어요.

Q.선수반 성적은 어떤가요?

나쁘지않아요. 당장 올해만봐도 KYBL 전국 유소년 농구 대회 3학년부 중등부 3위, 춘천 YMCA 3 x 3 대회 중등부 1위, 2위, 3위 및 개인 슈팅 대회 1위, 2위에 입상했으며 성남시배 전국 유소년 대회에서는 중등부가 참가하여 준우승을 거뒀죠. 아주 큰 대회들은 아니지만 꾸준히 참가해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것만으로도 동기부여와 성장의 밑거름이 되지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선수 반에만 신경쓰는 것은 아닙니다. 순수 취미반도 똑같이 애정을 기울이고 있어요. 당초 농구교실을 하게된 목적은 농구의 재미를 즐겁게 즐기자는 취지입니다. 그런만큼 모두가 농구를 좋아했으면 하는 마음이에요. 순수 취미반은 평일반과 주말반 2개 시간대로 나뉘어 운영되며 개인 체력 향상 및 아이들의 교우 관계는 물론 단체 생활에 따른 사회성 기르기를 중점으로 진행되요. 팀을 위한 희생정신과 개인 기량 발전에 따른 성취감을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생활체육에 대한 흥미를 고취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완 파워피처 김희건을 기억해주세요”

Q.큰 아들이 야구를 잘하는 것 같은데 이름이 어떻게 되나요?

김휘건입니다. 올해 천안북일고에서 휘문고로 전학을 갔어요. 오른손 투수고요. 저희 부부를 닮아서인지 신체조건(190cm)도 좋아요. 큰키에서 내리꽂는 강속구가 장점이라고 평가받고 있어요. 문동주, 심준석, 김서현 등 최근 들어 고교야구계에서 파워피처형 기대주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잖아요. 저희 아들도 거기에 포함되어 앞으로 프로에서도 좋은 활약을 펼쳤으면 좋겠어요. 휘건이와 같은 우완 파워피처 마산용마고 장현석, 장충고 육선엽 거기에 천안북일고 이현욱, 장충고 황준서 등 왼손투수들의 활약도 주목을 끌고있고 사이드암 강속구 투수 비봉고 이우현까지 쟁쟁한 경쟁자들이 많더라고요. 휘건이가 더 열심히해서 누구와 붙던지간에 제몫을 할 수 있는 선수로 인정받기를 바래봅니다.

Q.부모님이 농구를 하셨는데 왜 야구를 시키셨어요 물어보려다가 질문이 쏙 들어가버렸어요.(웃음)

(웃음) 예전에는 가끔 그런 질문을 받기도 했었는데요. 어쨌거나 기특하게도 야구를 잘하고있는지라 아쉬움은 없어요. 본인이 선택한 쪽에서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요. 농구도 곧잘 해요. 중3때 코로나가 터져서 저희 클럽에서 살다시피했는데 몸놀림도 좋고 파워풀하더라고요. 어차피 이제는 가야할 길이 정해져있지만 농구를 했어도 평균 이상은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하핫…, 제가 너무 고슴도치인가요? 본래 부모 마음이 다 그렇잖아요. 내 새끼는 뭘해도 잘할 것 같은.

Q.천안북일고에서 전학갔으면 한화 팬들은 서운하겠…, 아 어차피 전면드래프트군요?

네, 이제는 전면드래프트라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한화에서 휘건이를 좋게 봐주시면 드래프트에서 뽑는 것이고 아니면 더 좋다고 생각하는 선수를 선택하겠죠. 최근들어 한화가 하위권을 멤돌고 있지만 굵직한 파워피처들을 계속해서 지명하면서 내실을 다지고 있잖아요. 야구는 다른 종목과 달리 시간이 걸리는 만큼 그렇게 좋은 선수들이 쌓이게 되면 다시금 전성기가 찾아오지않을까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 휘건이가 선택받아 거기에 힘을 보태면 더욱 좋고요. 솔직히 아직 3학년 시절이 남아있잖아요. 좋은 평가를 받았던 선수들도 활약도에 따라 평가가 떨어지기도하고 갑자기 뉴 스타가 탄생하는 무대가 고교야구인만큼 아직은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죠. 다행히 휘건이도 그러한 흐름을 잘 알고 있는지라 성실하게 자신을 갈고 닦고있습니다.

Q.상황에 따라서는 두산에 갈 가능성도 있겠네요?

맞습니다. 전체 2순위 지명권을 가지고 있는지라 두산에만 지명되어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 볼수 있죠. 선수들을 잘 키우는 팀인데다 이승엽 감독이 새로 취임하면서 분위기도 달라질 듯 싶어요. 아무래도 야구를 하는 자녀를 두다보니 농구 이상으로 야구에도 관심이 많이가네요. 선수 말년에 워낙 심하게 부상에 시달리다보니까 한참동안은 농구 생각을 하고싶지 않은 적도 있었어요. 당시 부상치료와 재활 등이 제대로 되지 않다보니 지금까지도 무릎이 아파서 고생하고 있다니까요. 단순히 운동이 문제가 아니라 일상생활도 힘들 때가 있어요. 지금도 무리하면 아파요. 나이가 들다보니까 더 약해지는 듯 싶기도 하고요. 산을 탄다거나 그런 것은 생각도 못하죠.

“수술후 급한 복귀, 결국 다시는 건강한 몸으로 뛸 수 없었습니다”

Q.부상으로 고생이 많으셨네요.

그렇죠. 어느정도 뛰면서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면 한이라도 없었겠지만 은퇴전 2시즌을 대부분 부상, 재활만 반복하다보니까 한동안은 트라우마가 남더라고요. 농구를 떠올리면 그런 생각만 나는거에요. 더욱이 은퇴 후에도 후유증으로 적지않게 시달리다보니 다 꼴도 보기 싫더라고요. 어찌보면 젊은 시절을 다 보낸 코트인데 좋은 기억보다 힘든 기억이 더 강렬했으니까요. 물론 시간이 약이라고 지금은 농구교실도 하면서 좋았던 시절도 회상하고는 하지만 당시에는 그랬습니다. 제가 현대를 비롯해서 금호생명 팰컨스, KB국민은행 세이버스까지 길지않은 프로생활 동안 3팀을 거쳤어요. 물론 현대를 제외한 나머지 두팀은 1시즌씩만 뛰고 부상으로 제대로된 활약을 못펼쳤지만요. 제가 현대에서 끝까지 있다가 은퇴한줄 아는 팬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Q.차라리 오랜 시간 활약해온 현대라면 몰라도 새로운 팀에서 부상과 재활을 반복했던지라 눈치도 보였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요. 팀에서 눈치를 주지않더라도 제가 보일 수밖에 없죠. 해당 팀들에서 저를 선택한 것은 즉시 전력으로 활용하려는 의미였을 것 아니에요. 기껏 데려왔는데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니까 예쁘게 보이지는 않았을 듯 싶어요. 크고 작은 부상은 계속 있어왔지만 제일 힘들었던 것은 역시 무릎입니다. 그냥 일상처럼 무릎 통증을 달고 살았으니까요. 그러다가 금호로 트레이드 된 후 안되겠다싶어서 무릎 수술을 받았어요. 한쪽도 아니고 양쪽 모두에 칼을 댄거죠. 무엇보다 새로운 팀에서 잘해보려고 수술을 결심한 의미가 컸습니다. 수술을 결심할 때까지만해도 건강한 몸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어요. 하지만 뜻대로 안되더라고요. 조바심이 가장 큰 문제였죠. 수술후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재활을 했어야 되는데 저도 급하고 팀도 급했습니다. 언제 오냐고 계속 연락이 왔고 저 또한 편하게 재활에만 신경쓸 수는 없더라고요. 지금이야 그러면 외려 손해라는 것을 다들 잘 알고 있죠. 당시에는 안그랬어요. 금호에서 에이스 역할을 기대받고 있던지라 책임감도 컸습니다. 결국 급한 마음에 서두른 복귀로 인해 다시는 건강한 몸으로 뛸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Q.크게 상처받을 일도 많았을 듯 싶어요.

다치고 아픈 것은 불가항력적인 일이지만 어쨌든 제가 정상적인 몸이 아닌지라 팀에게도 미안한 부분이 있었죠. 그래서 어지간한 일은 그러려니 이해하려고하는 편이었어요. 하지만 금호에서 국민은행으로 가게된 상황은 다소 상처로 남더라고요. 당시 금호에서 국민은행 김지윤 선수를 자유계약 선수로 데려왔어요. 그렇게 선수를 데려오면 보상선수를 내주던지 현금으로 보상해주는 제도가 있거든요. 보상선수는 보호선수 5인을 제외하고 데려갈 수 있어요. 충격적이었던게 제가 5명 안에 안들어가 있더라고요. 많이 서운하더라고요. 아마도 제가 재활중이라 안데려갈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저로서는 자존심도 상하고 이래저래 참담했죠. 신인으로 입단한 곽주영 선수까지 보호선수 안에 들어가 있었거든요. 그러던중 국민은행 측에서 연락이 왔어요. ‘우리는 이왕이면 너를 데려오고 싶다. 무릎 상태는 어떠냐?’고 물어오더라고요. 어쩌겠어요. 이왕 뛰려면 저를 필요로 하는 쪽으로 가는게 낫지않겠어요. 그래서 급하게 재활을 마치고 국민은행에 합류했어요. 하지만 안될려면 어떻게든 안되더라고요. 훈련 중에 사단이 나버린거죠.

 

Q.사단이라 하면?

일단 국민은행에 가서 합류는 했는데 내색은 안했지만 스트레스가 많았어요. 통증은 여전하지 몸은 마음대로 안움직이지…, 그래도 참고 계속했어요. 그러다가 시즌에 들어가서 원정경기 전날에 연습경기를 하는데 거기서 또 크게 다쳐버린거죠. 후배가 공을 던졌는데 멀리 가버린거에요. 그걸 잡겠다고 달려가서 높이 점프를 했는데 착지하는 순간 연골이 뚝 끊어지면서 말려서 올라갔어요. 사실상 시즌아웃이 되어버린 것이죠. 그래도 국민은행 측에서 배려를 해줘서 일본 나고야로 넘어가서 거기에서 재활을 했어요. 아는 사람이라고는 전혀없는 시골에서 혼자 외롭게 재활에 전념했습니다. 저 역시 어떻게든 몸을 회복시켜 보란 듯이 뛰어보고 싶었으니까요.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아쉽게도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안보이는거에요. 무릎에 물이 차면 그걸 빼는 과정을 수시로 반복했어요. 그러다보니 몸과 마음이 모두 피폐해지더라고요. 농구선수 뿐 아니라 그냥 일반인으로 살아가야 할 날도 많은데 이러다가 정상적인 생활도 힘들어지는 것 아닌가 걱정도 되고 이래저래 지쳐가던 시절이에요. 당시 국민은행이 천안에 있었거든요. 물 뺀다고 서울을 오가는 것도 미안하고 힘들고 그랬어요. 도저히 안되겠더라고요. 결국 마음을 내려놓고 은퇴를 결정하게 됐습니다.

Q.몸이라는게 한군데가 아파버리면 도미노처럼 다른 곳도 악영향을 끼치더라고요.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원래 제가 왼쪽 무릎만 아팠는데 그러다보니 오른쪽에 좀더 힘을 주고 의지를 했나봐요. 나중에는 오른쪽까지 탈이 나버렸습니다. 본래는 한쪽씩 수술을 해야되는데 병원측에서는 ‘간단한 관절경 수술이니까 양쪽 다 한꺼번에 해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무릎을 보면 반월판이라고 있잖아요. 관절 내 편평하고 반달 모양을 띤 곳으로, 무릎이 우리 몸의 체중을 견뎌낼 수 있게끔 쿠션 역할을 해요. 저는 반월판 모양이 다른 사람하고 다르다고 하더라고요. 저같은 경우는 원판형 모양으로 기형에 속한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그런 반월판을 가지고 30년 가까이 운동해왔던 것이죠.

Q.아…, 본래부터 무릎이 다른 선수들보다 불안한 구석이 있었네요?

꼭 그렇다고 장담 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무릎으로 인해 고생을 너무 많이한 제 입장에서는 일반적인 모양과 다르다는 것만으로도 ‘그래서 무릎이 자주 고장났던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더라고요. 당시 선생님께서 완치를 장담하셨는데 제가 가지고있던 기형적 반월판의 특성을 고려해서 그런 것인지 좀 많이 잘라내셨어요. 그런 부분이야 의사의 소관이고 영역인데 문제는 완치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거기에 선생님의 무책임한 말 한마디가 저를 굉장히 분노하게 했습니다. 좀처럼 나을 기미가 안보이니까 팀에서 ‘왜 이렇게 완치가 더디냐?’고 선생님에게 물어왔나봐요. 선생님의 대답이 가관이었죠. ‘그럴 리가 없는데…, 지금 저 선수가 꾀병을 부리는 것 같다’고 한거에요. 다른 곳으로 이동하다가 그 얘기를 전해 들었는데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더라고요. 오죽했으면 운전하고 있던 분에게 ‘차돌려요. 지금가서 저 사람 죽여버릴거야’라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람을 그 지경을 만들어놓고 꾀병이라는 표현은 너무 심했던 것 아닐까요.

Q.그렇지않아도 정신적으로 힘들었을 상황에서 충격이 컸을 듯 싶어요.

말해 뭐하겠어요. 나름 잘 잡아놓고 있던 멘탈이 순간적으로 ‘펑’하고 깨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수술한 곳에서 재활까지 함께 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래야 더 상태를 확실히 알수가 있고 나아지는 과정도 함께 체크가 가능하니까요. 과거에는 조금 달랐어요. 수술하는 병원과 재활하는 병원이 따로인 경우가 대다수였어요. 뭐, 그럴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담당자들이 서로 다르니까 바로바로 피드백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죠. 마음만큼 회복이 안되니까 정말 힘들더라고요. 당시 수술을 영동 세브란스에서 했거든요. 수술한 선생님도 그런 쪽으로 국내에서 손꼽히는 권위자라고 평가받는 분이었는데 이래저래 저하고는 안맞았나봐요. 어쨌든 그때 수술과 회복 실패 이후 저는 365일 통증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칠 때 조금만 몸을 많이 써도 다음날되면 팅팅 부어오르고 그래요. 아마도 평생 그렇게 갈 것 같은데 정말 저에게는 업보같은 사건이었죠.

Q.수술로 인한 후유증도 안타깝지만 애당초 기본적인 무릎 관리만 되었어도 그렇게 심하게 망가지지는 않았을 듯 싶어요.

그렇죠. 혹사에 혹사가 거듭되고 치료나 재활도 제대로 안 이뤄지고 무릎이 회복할 시간자체가 없었다는 점에서 저 스스로도 안타까워요. 무릎 통증이라는게 사이클이라는게 있더라고요. 어느 정도 쉬고 재활이 잘되면 통증이 현저히 약해지거나 아예 느껴지지 않는 시기가 있거든요. 그러다가 또 고통이 밀려오기도 하고…,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아요. 그럴 때 팀에서 조금만 배려해주면 확실히 달라질 수 있거든요. 현대 시절 막판에 있던 일이에요. 당시 K 코치님이 감독대행으로 승격한 일이 있었어요. 본인도 잘해보겠다고 선수단과 미팅을 했죠.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눠보자고해서 제 무릎 상태에 대해 말씀을 드렸어요. 특별한 대접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되도록 참고 뛸테니 정말 많이 아플 때 잠깐씩만 휴식을 주면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하겠다는 마음을 밝혔죠. K 감독대행도 알겠다고 약속을 했어요. 그나마 안도의 한숨이 쉬어지더라고요.

Q.왠지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을 것 같아요.

아쉽게도 그랬습니다. 시즌을 치르다보니 어느 순간 무릎이 너무 아프더라고요. 난감했지만 그래도 감독대행님과의 약속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트레이너를 통해 전달했는데 답변이 이전 약속과 다르더라고요. 그냥 뛰라는 겁니다. 정말 아프다고 다시 말씀을 드렸지만 역시나 돌아오는 답은 같았습니다. 속았다는 생각, 배신감 등에 정말 화가 났어요.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코트로 나가서 투덜투덜대면서 볼을 튀기면서 연습을 했죠. 그걸 지켜보던 감독대행 입장에서는 제 표정과 태도가 마음에 안들었던 듯 싶어요. ‘너, 나가!’ 그러더라고요. 저도 울컥해서 뒤도 안돌아보고 나가버렸죠. 억울하고 분하고 그랬지만 어쩌겠어요. 이후 감독실로 찾아가 죄송하다고 사과를 드렸지만 문도 안열어주고 소통자체를 거부하시더라고요. 많이 괘씸하게 느끼셨나봐요.

Q.금호생명으로 트레이드 된 것과 무관하지 않은 과정이었던거죠?

그렇죠. 감독대행님은 저를 사람 취급도 안해주시고 이제 농구를 못하게되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금호생명에 있던 후배에게 너희 감독님에게 가서 나 뛸자리 있냐고 물어봐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사실 별반 기대는 안했지만 당시 상황은 너무 앞이 캄캄했으니까요. 그런데 다음날 거기 감독님에게 전화가 왔어요. 그렇지않아도 트레이드 진행중이니까 가만 있으라고요. 이미 저 모르게 트레이드 얘기가 오고 갔던 것입니다. 뭐, 사실 프로의 세계에서 트레이드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당시는 초창기이기도 하고 이래저래 머릿 속이 먹먹하더라고요. 당시 정서는 입단한 팀에서 뼈를 묻는 것이 당연했거든요.

Q.이래저래 당시 선수들을 보면 기분좋게 은퇴한 케이스가 많지 않을 듯 싶어요.

맞아요. 여한없이 기분좋게 은퇴한 선수도 많았지만 반대 케이스도 적지않았어요. 이유야 여러 가지겠죠. 사람에 대한 아쉬움일 수도 있고 상황에 대한 불만일 수도 있고요.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저같은 경우는 상황적인 측면이 컸죠. 수술하고 재활하고 잠깐 뛰고 또 치료하고 등 지긋지긋하게 부상에 시달렸던지라 농구를 즐기지못했어요. 몸이 아프면 마음도 같이 망가진다고 하잖아요. 멘탈적으로 꽤 강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당시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다들 마찬가지겠지만 운동선수는 뛰어야 운동선수거든요. 내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않고 계속해서 고통에 시달린다면 일상 자체가 힘겨워져요. 은퇴가 아니라 사실상 탈출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거에요. 당시 심정만 봐서는요.

“폭력이 너무도 당연시되던 시절이었습니다”

Q.사람이 정상적인 몸상태와 컨디션으로 뛰는게 더 이익일텐데 그 시절에는 왜 그랬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그냥 참아’가 일상화된 문화의 영향도 컸을 듯 싶어요. 정말 피가 철철나거나 뼈가 부러지지 않은 이상 어지간한 부상은 티를 내는 것만으로도 엄살로 보였거든요. 투지를 강조하던 시절이라 근성이 없다는 얘기를 들을 수도 있었고요. 저희를 가르치시는 지도자 분들은 당연히 그렇게 농구를 해오셨고 선수들 역시 대부분 비슷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게 맞죠. 원래 그렇잖아요. 선수 시절 그렇게 고생하면서 나는 안그래야지 하다가도 막상 가르치는 입장이 되면 ‘너는 왜 그래?’가 되어버리는거죠. 빠른 세대교체라는 명분도 있었지만 그 시절 여자선수들의 선수 수명이 짧았던 데에는 그러한 부분도 작용했다고 봅니다. 아주 한해 한해 몸을 갈아넣는거죠. 지금이야 입단 7년차하면 여전히 창창하다는 소리를 듣지만 당시에는 최고참급 취급을 받았어요. 더 버티면 욕심이 많다는 얘기도 나왔을 정도니까요. 저 입단할 때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서경화 언니가 최고참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Q.정말 하나하나가 정말 힘든 시절이었던 듯 싶어요. 거기에 여자선수들에게도 폭력이라는게 존재했었잖아요. 그 시절 여자농구 선수분들을 인터뷰하면서 가장 크게 놀랐던게 만연했던 폭력이에요.

맞습니다. 남자선수들은 더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저희 여자선수들 또한 폭력으로 인해 몸과 마음에 큰 상처가 남은 케이스가 적지않아요. 지금 선수들이야 상상이 안가겠지만 말 한마디 잘못하거나 아님 그냥 마음에 안들어도 뺨 몇 대 맞는 것은 일도 아니었어요. 물론 팀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을거에요. 정확하게 말하면 어떤 감독이 오느냐에 따라 전체 분위기가 바뀌는 경우가 많죠. 저는 현대 시절 L 선생님, J 선생님을 모두 겪은 케이스입니다. 두분 다 피가 뜨겁고 손이 맵기로 유명한 분들이잖아요. 그래도 L 선생님은 말년이었던지라 한창 때에 비해 성질이 많이 죽은 편이었어요. 명성만큼 선수들을 심하게 때리지는 않았어요.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과격하시고 무서운 부분도 많았지만요. 오히려 기억에 남는 것은 J 선생님이에요.

Q.아 그래요? L 감독은 워낙 악명을 많이 들었는데 J 감독도 그랬나요?

폭력으로 너무 유명해져서 언론에서 공식사과까지 한 일도 있었으니까요. 폭력으로 제명되었다가 중국까지 갔다오셨잖아요. 힘도 좋고 정말 무지비하게 때려요. 하지만 어디 J 선생님 뿐이었겠어요. 여러 가지 부분에서 폭력이 묵인되던 시대인지라 욕하고 폭력을 달고 사시는 분들이 정말 많으셨죠. 프로 초창기까지도 폭력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았으니까요. P 감독도 있고 정말 많았어요. 나중에 남자농구 감독까지 하셨던 K 감독님도 장난아니셨죠. 옆집 아저씨같은 외모와 달리 남자선수, 여자선수 차별을 두지않고 공평하게 때리시는 것은 물론 재떨이 들고다니는 것은 거의 일상이었죠. 재떨이를 왜 들고다녔는지는 따로 설명하지않겠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코치님이 정말 무서운 분이셨어요.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어요. 지금이야 냉난방이 잘 되어 있는 환경이지만 당시에는 안그랬어요. 특히 겨울철 체육관은 정말 추워요. 바람만 안들어오다뿐이지 정말 덜덜 떨리거든요. 당시 코치님은 학생들의 운동하는 자세가 마음에 들지않는다 싶으면 일단 반지부터 빼요. 그리고 가죽 장갑을 끼는거죠. 그럼 그날은 두들겨 맞는 날이에요. 날씨도 춥잖아요. 본인 손은 소중하니까 보호해야겠죠. 그리고 얼어있는 여자 아이들 뺨을 사정없이 후려갈기고 발로 차버려요. 뭐 피하기를 하겠어요. 반격을 하겠어요. 마네킹처럼 서있다가 무자비한 폭력을 몸으로 받아내는거죠. 지금의 사고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될거에요. 해서도 안되지만 할수도 없고요.

“식스맨으로서의 오랜 경험을 통해 여러 가지로 인생을 배웠습니다”

Q.현대 시절 선수로서의 입지는 어땠나요?

저같은 경우는 현대에 입단하고 나서 4~5년은 계속 식스맨으로 뛰었습니다. 나름 열심히했지만 현대에 워낙 걸출한 언니들이 많아서 주전으로 치고 들어가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어요. 언니들은 실력도 대단했지만 또 노력도 많이해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될 정도였습니다. 어쨌거나 저도 선수로 들어왔으니까 욕심이라는게 있잖아요. 정말 잘하고 싶었어요. 매시즌 들어가기 전에는 ‘이제는 네가 해야한다’하면서 엄청 맞아가면서 훈련도 독하게 소화하고 했는데 정작 시즌에 들어가면 넣다 뺐다가 반복되는거죠. 출장 시간이 보장된 것이 아닌지라 마음 속에서는 잘해야 된다는 생각이 가득한데 조금만 실수하면 바로 빼버리니까 몸이 경직되서 더 잘안되는거에요.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도 정말 많이 받았어요. 신경정신과 병원을 찾기도하고 심지어 MRI도 찍어보고 그랬어요. 머리가 너무 아프니까요. 좋았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런 경험이 많은지라 식스맨의 설움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Q.그래도 꿋꿋하게 버티신 것만으로도 대단하세요.

그것만도 아니에요. 3년차인가 4년차인가 정확히 기억은 나지않지만 더 이상 못견딜 것 같아서 짐을 싸서 나간 적이 있어요. 농구도 좋지만 지금까지 해온 노력으로 다른 것을 하면 그쪽이 더 미래가 있을 듯 싶었어요. 그러던 어느날 당시 새로이 팀에 부임하신 J 선생님이 집으로 전화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다시 들어오라고 하신거죠. 다른 선수들은 휴가기간이었고 저는 팀을 나간 상태였습니다. 그때 저랑 같이 팀을 떠난 선수가 한명 더 있었는데 1년 선배인 조인현 언니였어요. 그런데 언니에게는 복귀하라는 연락을 안했나봐요. 저는 몰랐죠. 그저 비슷한 심정을 겪고있는 사이였으니까 ‘집에 전화도 자주오고 그러는데 현재 마음으로서는 안들어가고 싶다’는 등 허심탄회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았죠. 정말 그때 심정은 다시 돌아가고 싶지않았어요.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동안 해온 것이 아깝기도하고 부모님께서도 설득을 하셔서 다시 돌아가게 됐습니다.

 

Q.J 신임 감독과의 첫 만남은 어땠을까요?

처음 대면하는 자리에서도 강렬했어요. 선수들과 함께 서있는데 앞으로 나오라고 하더라고요. 어리둥절해서 나갔더니 갑자기 뺨을 엄청 세게 후려갈기시더라고요. 황당하기도하고 어리둥절했습니다. ‘왜 맞았는지 알아?’물어오시는데 저도 모르니까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모르면 더 맞아야지’하면서 또 뺨을 때리시는거에요. 너무 아프기도하고 상황 자체가 두렵고 낯설고 황당했던지라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고요. 선생님 말씀은 그랬습니다. 본인이 전화한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왜 말을 했냐는 것이 때린 이유였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조인현 언니에게는 들어오라는 말을 안했잖아요. 그러니까 언니가 전화해서 서운하다고했나봐요. 하지만 저도 할말이 있는게 친구들하고 휴가나왔다가 어머니에게 팀에서 연락왔다는 것을 전해듣고 착찹한 마음에 바로 조인현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난 별로 들어가고싶지않다고 말했던거죠. 비밀유지고 뭐고 그런 것을 전해들고 판단할 겨를 조차 없었습니다. 그렇게 말을 했더니 그제서야 J 선생님이 표정을 조금 푸시더니 ‘그랬냐. 알겠다. 오해풀렸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때 그일이 제가 선생님에게 본격적으로 맞게되는 시발점이 된 것 같아요.

Q.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 시절 폭력을 잊지 못하는 선수들도 많을 듯 싶어요.

잊어버릴 수가 있을까요…? 그런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평생 못 잊을 것 같아요. 한번은 중국에 원정 경기를 갔는데 게임이 잘 안풀렸어요. 그런 와중에 제가 작전판을 안쳐다봤나봐요. 뭐 딱히 특별한 이유는 없었어요. 그때 그순간 작전판에 눈을 안둔 것이 죄라면 죄죠. 어쨌거나 J 선생님의 심기를 건드린거죠. 갑자기 폭발하시더니 정말 개패듯이 때렸어요. 너무 심하게 때리니까 안되겠다 싶었는지 당시 김광 코치님이 말리셨어요. 하지만 눈이 돌아간 선생님은 아무 것도 안보이셨나봐요. 말리는 코치님까지 때리더라고요. 그리고 중국원정 기간 내내 왕따를 당했어요. 저한테 말거는 선수들은 죽여버린다고 엄포를 놓으신거죠. 그냥 투명인간처럼 지내야 했습니다.

Q.간판스타 전주원의 부상 공백을 메우고 준우승에 기여를 하면서 박수를 받기도 했어요.

그랬었죠. 현대가 좋은 선수들이 많은 편이기는했으나 주원 언니는 압도적인 실력자이면서 정신적인 리더이기도하거든요. 존재감이 엄청났죠. 그런 언니가 십자인대가 나가는 부상을 당하게되자 그야말로 큰일났다는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어쨌거나 그런 상황에서 제가 빈자리에 투입되어 나름 역할을 잘했죠. 빈자리 메우기, 식스맨 역할은 이골이 난 상황이었으니까요. 공격도 그렇지만 수비시에는 센터빼고 1~4번까지 다 막아봤습니다. (유)영주 언니나 (정)선민 언니같은 정통 4번을 막기도하고 그랬습니다. 어쨌거나 당시 주원언니의 공백을 메워야된다는 부담감은 컸지만 저에게 100%기회가 온거잖아요. 자신감을 가지고 악착같이 뛰었어요. 열심히 하다보니 경기력도 올라왔고 주간 MVP 등 소소한 상도 여럿 탓도 기억이 납니다. 우승까지했으면 정말 좋았으련만 아쉽게도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죠.

Q.농구대잔치 시절 현대라는 팀의 인기가 대단했어요. 당시에도 체감하셨나요?

많이 느꼈죠. 정말 팬들도 많았고 함성과 응원소리 등 인기를 많이 실감했습니다. 준우승을 아쉬워했던 당시에도 팬들이 밖에 가득해서 나가지를 못했던 기억이 생생해요. 결국 경찰 분들이 오셔서 에스코트하에 나갈 수가 있었죠. (전)주원 언니를 비롯해 워낙 기량과 매력이 출중한 선수들이 많아서 그런 듯 싶어요. 거기에 정말 경기도 악착같이 뛰었고요. 그런 인기팀에서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뿌듯했던 시절입니다.

Q.인터뷰하시면서 예전 생각 많이 날 것 같아요.

그러네요.(웃음) 초등학교 시절 육상부를 하다가 농구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스카웃되어서 코트를 밟게됐고 (김)지윤이 등과 함께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압도적인 화력으로 전관왕을 차지했던 것부터 부상악몽, 길었던 식스맨 생활, 억울하고 서러웠던 기억까지 오랜만에 하나하나 떠올려봤네요. 돌이켜보면 아쉬웠던 것 이상으로 즐거웠던 순간도 많았습니다.

Q.아참! 선수 시절 별명이 궁금합니다.

지나고 나니까 유명한 별명이 남아있는 선수들이 부러워져요. 해당 선수의 개성을 나타내는 부분도 있는지라 별명이 강렬한 선수들은 쉽게 잊혀지지 않거든요. 뭐, 일부러 만든다고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기억해야 되는 부분이라서 더 그런 듯 싶어요. (김)영옥 언니의 ‘총알 낭자’같이 기가막힌 별명이 하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사실 기억될 별명이 없는 선수들이 훨씬 많거든요. 별명이라고 해야할지는 모르겠으나 (전)주원 언니가 책받침이라고 부르기는했어요. 뒤통수가 납작하다고.(웃음) 당시 현대와 가계약이 되어있어서 학교 다닐 때부터 언니들을 자주 만났었거든요. 같이 운동하다보면 허물이 없어요. 그래서 언니들이 동생들을 애칭(?)으로 많이 불렀던 기억도 나요. 이름에 ‘자’자를 붙이던 것도 한때 유행을 탔어요. 예를 들면 (김)성은이 같은 경우 ‘성자’ 그런 식이었죠. 사람에 따라서는 ‘촌스럽게 뭐야’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시간이 흐르고나니 하나하나가 아련한 추억같이 느껴집니다.

Q.마지막으로 여전히 선수 정윤숙을 기억하고 사랑해주시는 팬분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여러 가지로 고생을 많이 했던지라 솔직히 잊고 싶었던 부분도 많아서 한동안 농구를 멀리 한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좋은 기억도 많이 있었던 듯 싶어요. 특히 지금도 알아봐주시는 팬 분들을 만나면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 뭔가 잊고있었던 코트에서의 설렘이 느껴지기도 하고요. 어쩌면 제 농구인생에서 가장 가치있고 의미있었던 순간은 팬들과 함께 코트에서 교감했던 바로 그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비록 농구 발전에 큰 기여는 못하고 있지만 많은 아이들에게 농구에 대한 즐거움을 안겨주는데 최선을 다할까 합니다. 제가 선수때 많이 느끼지 못했던 즐거운 농구, 행복한 농구를 아이들에게 만큼은 온전히 누리게 하고 싶어요. 다들 즐거운 하루되세요.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기사제공 점프볼

김종수 oete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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