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미국에서의 10년, 한국에서 꽃을 피우고 싶어요”
기사입력 2022.12.27. 오전 09:01 최종수정 2022.12.27. 오전 09:01
[김종수의 농구人터뷰(67)] '도전자' 하숙례
”제가 느끼는 농구요? 항상 도전해야 되는 대상입니다.“
하숙례(52‧175cm) 한세대 교수가 농구를 바라보고 접근해온 방식이다. 선수와 지도자로 40여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해온 종목인지라 세상 무엇보다도 친근하고 익숙하지만 여전히 그 끝을 알 수 없는 것이 농구라는게 그녀의 생각이다.
“리듬감있게 바닥을 튕기면서 함께 걷고 뛰고, 던지고 다시 잡고 동료에게 주고, 그러다가 상대에게 공이 가면 다시 빼앗으러 가고…, 그것을 한경기에서만 엄청나게 반복하는거죠. 내쪽으로 흐름이 올 때도 있지만 상대편에게 갈 수도 있고 또 서로에게 가지못하게 필사적으로 방해하고 정말이지 가끔은 전쟁의 축소판이라는 생각까지 들 때가 있습니다”
전쟁의 최종 목적은 하나다. 이기는거다. 침공해온 자는 정복을, 막아내야만 하는 자는 지켜내야만이 전쟁이 끝난다. 정면에서의 힘대결도 중요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상대를 무너뜨릴 전략을 세우고 상황에 따라서는 암수도 필요한 것이 바로 전쟁이다. 그런만큼 오랜시간 동안 발전을 거듭해왔고 비슷한 시기에 발발이 되도 늘 변수가 뒤따른다.
농구 역시 마찬가지다. 정규시즌에서는 며칠 간격으로 계속해서 경기가 치러지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경우 경기텀은 짧아지고 매경기 총력전이 펼쳐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경기, 매순간 양상이 달라지고 때로는 예상하지못한 변수로 인해 승패가 엇갈리기도 한다. 스타급 주연은 물론 잠깐 코트에 나선 백업 멤버도 얼마든지 씬스틸러가 될 수 있는 각본없는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하숙례는 비슷한 시기를 살아온 어떤 선후배보다도 오랜시간 농구와 함께 해오고 있다. 삼천포여종고 재학시절부터 될성부른 떡잎으로 불렸던 그녀는 학교 선배인 성정아, 하미숙을 잇는 대형 유망주로 주목을 끌었다. 1988년 제43회 전국종별 농구선수권대회 여고부경기에서 평균 25.7득점, 11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삼천포여종고의 대회 2연패를 이끄는 한편 최우수선수로 뽑히기도 했다.
국가대표 감독을 지냈던 모 농구인은 "언더사이즈 빅맨이기는하지만 체력과 운동능력이 워낙 좋은지라 당장 국가대표로 기용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는 극찬으로 여고생 하숙례에 대한 평가를 내린바 있다. 1989년 코오롱에 연고선수로 입단하고 나서도 활약은 계속됐다. 팀에서의 활약은 물론 국가대표로도 좋은 모습을 보였다. 실업 2년 차에 태극마크를 달았으며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여기까지만하고 은퇴했어도 농구계에 한획을 그은 인물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 분명했지만 하숙례의 농구 2막은 선수를 그만둔 후 더욱 가속화됐다. 일본 여자프로농구 덴소에서 1998년부터 2004년까지 코치(3년)와 감독(3년)으로 지도자 생활을 했고 미국에서도 워싱턴 주립대 어시스턴트 코치를 맡는 등 당시 인물중 드물게 외국에서 많은 경험을 쌓았다.
국내로 돌아와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용인대 감독을 맡았으며 길지는 않았으나 신한은행에서도 코치로 활동했다. 농구협회 국제 이사, 코치강습회 통역 등 잠시도 쉬지않는 가운데 여자농구 남북단일팀 코치 자격으로 평양 남북통일농구대회와 2018 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안게임을 치러낸 바 있다. 그런가운데 학업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2012년 한세대 교수를 맡아 지금까지 경력을 이어오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하숙례는 현재에 만족하고 있지않다. WKBL 감독 등 기회만 주어진다면 오랜시간 공부하고 경험해왔던 것들을 아낌없이 쏟아내고 싶은 욕심을 숨기지않고 있다. 예전부터 그래왔듯이 어렵다고 평가받아온 눈앞의 벽을 도전자의 입장에서 하나둘 깨고싶은게 그녀의 현재 바램이다.
”프로 생활과 공부 사이, 공부를 선택했습니다“
Q.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경기도 군포에 있는 한세대학교에서 2012년부터 교수로 있어요. 본래는 교양체육이었는데 제가 박사 학위를 여가레크레이션을 전공했어요. 그래서 현재는 그쪽으로 이론 수업도 하면서 학생들을 지도중이죠. 더불어 대학원에서는 연구법도 지도중입니다. 말그대로 논문같은 것 쓰는 것 연구하고 통계내는 것들을 가르친다고 보면됩니다.
Q.언제 또 그렇게 공부를 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거에요?
하핫…,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저같은 경우 농구대잔치 세대잖아요. 97년인가, 프로가 생기기 전에 선수를 그만뒀어요. 프로에서 러브콜이 오기는했지만 잠시 고민하다가 은퇴를 결정하게 됐어요. 프로의 세계도 좋아보이기는 했지만 대학에 진학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했지않나 싶어요. 당시 한체대를 졸업한 상태였는데 석사학위를 일본에서도 받을까하는 계획을 하던중이었죠. 마침 일본 프로팀에서 코치 제의가 와서 기회라고 생각해 바로 받아들였습니다. 공부하고 싶은 의욕은 현역 때부터 강했으나 선수 생활하면서 뭘 얼마나 준비했겠어요. 일본어도 모르던 시절인지라 현지에 가서 배워가면서 코치일을 했습니다.
Q.선수 시절에도 이른바 ‘깡’이 좋아보이셨는데, 거침이 없으셨네요. 저같으면 타국에 가서 그렇게 한다는게 쉽지 않았을 듯 싶어요.
제가 좋아서 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처음에는 바디랭귀지도 하면서 어렵게 소통하고 그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더라고요. 그래서 한체대에서 석사학위받고 본격적으로 일본 여자프로농구 덴소에서 지도자 생활을 이어나갔죠. 외국어는 왕도가 없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말이 정답인 것 같아요. 현지에서 하루 종일 그나라 말만 듣고 알아듣기 위해 애쓰다보면 어느새 훌쩍 늘어있더라고요. 3년 정도 코치로 열심히 하다보니 구단에서도 인정해줘서 감독도 3년을 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6년 정도 있으면서 경험도 쌓고 그러다보니 한국무대에 돌아가서 지도자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Q.그래서 바로 한국으로 오신건가요?
아니요. 제가 좀 준비를 꼼꼼하게 하는 편이라서요. 당시 WKBL에는 외국인선수 제도가 있었잖아요. 제대로 지도자 생활을 하기위해서는 외국인선수와도 척척 소통이 되어야겠다 싶어서 영어가 필요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미국으로 갔죠. 미국에서도 일본시절 못지않게 부지런히 뛰어다녔어요. 워싱턴 주립대학에서 어시스턴트 코치로 있었고 WNBA 소속 시애틀 스톰에서 코치연수를 하기도 했죠. 그렇게 3년간 공부도 하고 경험도 쌓으면서 나름대로의 준비를 마쳤습니다.
Q.한국으로 들어와서는 프로무대에서 지도자를 하게됐나요?
일본, 미국 등에서 공부도 열심히하고 경험도 쌓고 그러기는 했지만 국내에서는 지도자 하숙례가 어떤 인물인지 잘모르잖아요. 타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WKBL에서 하고있던 캠프가 있었어요. 거기에서 외국인 감독, 코치를 데리고와서 함께 참여하던 중 용인대에서 감독 제의가 왔어요. 이제는 돌아와야 될 때인가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을 계기로 국내로 오게된거죠. 용인대 감독으로 있으면서도 공부는 꾸준히 했고 WKBL 입성을 시도하고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교수가 먼저 되어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네요.(웃음) 길지는 않았지만 신한은행에서 코치로 있어봤고 2018년 당시 이문규 선생님이 불러주셔서 여자농구 남북단일팀 코치를 맡게 되는 등 나름대로 경험치를 만들어가는 중이에요. 대표팀 코치같은 경우 도쿄올림픽 티켓을 따오게된 2020년 2월까지 했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교수로 쭉 지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자에게 기회가 온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선수시절에도 그랬고 일본, 미국 등에서 부딪혀가면서 확실히 느꼈습니다. 원하는 곳으로가는데있어서 장애물이 생겨나고 공백기가 쌓여간다고 조급해하지 않으려고요. 외려 시간이 비어있을 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나중에 진짜로 기회가 왔을 때 제대로 잡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판가름난다고 생각합니다.
“10년간의 타국생활, 외로웠냐고요?”
Q.뭔가를 배우는데 있어서 열의가 엄청난 듯 싶어요.
제가 생각해도 그런 것 같아요. 선수로서 은퇴를 앞두고 있던 때부터 머릿속에서 앞으로 어떻게 공부해야겠다는 플랜이 어느 정도 짜여져 있었고 그 뒤에는 정말 즐기듯이 공부했어요. 항상 편했던 것만은 아니었지만 제가 원해서 그렇게 했던지라 행복감이 더 크지 않았나 싶습니다. 거기에 열의를 가지고 하다보니 주변에서 도와주시는 분들도 많았어요. 일본 덴소 시절에도 구단 차원에서 공부 하는 것을 도와주셨어요. 시간을 비어주는 것은 물론 경비적인 부분에서도 도움을 줬죠. 그래서 수요일 오전에 비행기를 타고갔다가 한체대에서 오후 수업받고 목요일날 하루종일 강의듣고 공부한 다음 일본으로 돌아가던 생활을 1년 반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일본이 다른 나라에 비하면 가깝기는하지만 제가 원하는 길이 아니었다면 수업을 듣기위해 나라를 건너다니는 것은 정말 쉽지않았겠죠.
Q.타국 생활이지만 외로움을 느낄 시간도 없었을 듯 싶어요.
맞아요.(웃음) 10여년을 일본, 미국에서 있었지만 외롭다는 생각은 거의 해보지 못했어요. 어려움은 있었어도 외로움은 없었던 것 같아요. 지도자로 있다보면 비시즌에도 준비할 것이 꽤 있거든요. 거기에 공부를 병행하다 보니까 다른 것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죠. 만약 단순히 공부만했거나 어학연수를 떠나고 그랬으면 분명 남는 시간도 있었을거고 외로움도 느꼈겠죠. 기본적으로 공부와 농구를 모두 좋아하다보니까 미국에 있을 때도 시간이비면 클럽에서 어린아이들도 가르치고 그랬어요.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찌하다보니 하루하루 일정이 빠듯했습니다. 기본적인 일정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밤 11시가 넘어가고 그랬어요. 그때부터 과제 등을 하고나면 금방 새벽 2~3시가 되더라고요. 힘들기는 했으나 재미있다는 생각이 더 많았던 시절이에요. 제가 원했던 방향이니까요.
Q.일본과 미국생활 중 어느때가 더 힘들었을까요?
일본같은 경우는 정식으로 요청을 받고 간것이고 구단에서 워낙 많이 챙겨주셔서 특별할 것은 없었어요. 미국은 달랐죠. 누가 불러준 것도 아니고 제가 영어를 배우고자 홀홀단신으로 불쑥 간 것이니까요.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 주립대에 처음 갔을 때는 살짝 막막했어요. 뭔가 목표를 세우고 온 것이기는 하지만 준비가 된 상태는 아니었잖아요. 더욱이 프로 지도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있던 일본 시절과 달리 미국에서는 일반 학생일뿐인지라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지더라고요. 일단 대학교 농구부가 궁금했어요. 그래서 되도 않는 영어를 끄적여가지고 이력서를 하나 준비해서 농구부로 찾아가서 여성 감독에게 내밀었죠. 어찌보면 동양에서온 늦깎이 학생일뿐인지라 관심을 끌기 힘들었을텐데 선수시절 국가대표를 했던 경력이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독이 그것을 보더니 바로 수긍을 하면서 언제든지 찾아와서 훈련하는 것 보고 조언도 부탁한다고 흔쾌히 허락을 해주더라고요. 선수 시절에도 그랬지만 대표선수로 뛰었던게 나중에까지 그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어요.
Q.코치는 어떻게 되신 것인가요?
당시 감독과 친분을 쌓아가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했어요. 그러다가 그분이 워싱턴 주 풀먼에 위치한 워싱턴 주립대로 옮겨가면서 저를 코치로 데려가게 된거에요. 학과에 소속된 코치로 해줘서 연구학자로 리서치를 해서 가게된 흔치않은 케이스에요.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배려를 해준거죠. 그래서 그곳에서 어시스턴트 코치로 있게됐는데 제가 가르친 것보다 배운게 더 많았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에서도 나름 만족할만큼 안착하게된 배경에는 일본 시절 경험도 영향이 컸어요. 일본에서 언어도 배우고 지도자 생활도 했으니 미국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거죠. 그래서 다들 경험 경험하나봐요. 비슷하게라도 해본 것과 안해본 것은 천지차이니까요.
Q.은퇴 후 행보가 정말 거침이 없으셨어요.
그런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해도 정말 직진 일색이었지 않나 싶어요. 하고자하는 의욕도 강했고 그러다보니 운도 좀 따랐죠. 단순히 선수 생활을 은퇴할 무렵에는 공부를 하고자하는 의지만 있었어요. 방향같은 것도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농구 선수 출신이기는 했으나 농구로 뭔가 연결시켜볼 생각도 없었고요. 일본에서 연락이 왔던게 참 좋은 기회였고 거기서 안주하지 않고 공부를 병행하면서 감독까지 갔던게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 같아요. 무엇을 해야하고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를 명확히 알게되었다고나 할까요.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것을 더욱 느끼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것이다 싶으면 망설이지않고 마음이 시키는 쪽으로 걸어갈 생각입니다.
“실질적으로 전 포지션 수비가 모두 가능했습니다”
Q.이제 선수 시절 얘기를 좀 해볼께요. 주포지션은 스몰포워드였던거죠?
네. 맞습니다. 당해 학년 랭킹 1위로 코오롱에 들어가서는 주로 3번으로 뛰었죠. 하지만 삼천포여종고 시절에는 조금 달랐어요. 사이즈는 크지 않았지만 파워포워드로 자주 출장했어요. 거기에 저희 학년에 키큰 선수가 거의 없던 관계로 센터로 나설 때도 있었고요. 요즘 말로 하면 언더사이즈 빅맨이었던거죠. 주로 힘세고 큰 선수들과 매치업되어 버티어나가는 쪽으로 커나가다가 청소년대표, 코오롱시절부터 외곽슛도 적극적으로 던지면서 스몰포워드에 맞는 스킬과 움직임을 가져가기 시작했죠.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4번으로도 종종 나갔어요. 3번과 4번이 모두 가능한 선수는 팀 입장에서도 만능 치트키처럼 여겨졌을테니까요.
Q.어찌보면 유영주가 생각나기도 하네요?
맞아요. 그래서 영주하고 자주 매치업되어서 옥신각신했던 기억이 많이 납니다. 영주는 정말 대단한 선수였어요. 기본적으로 힘이 좋아서 어지간한 센터와도 몸싸움이 가능할 정도였는데 거기에 기동성, 기술 등도 겸비했던지라 3번도 잘봤죠. 워낙 센스가 있고 흐름을 잘 읽는 선수인지라 방금 전까지 4번 봤다가도 바로 3번으로 자연스럽게 위치 변경이 가능할 정도였어요. 물론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을겁니다. 말이 그렇지 자신에게 익숙한 포지션이 있는데 다른 쪽까지 넘나드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그게 쉽다면 포지션 구분이 왜 있었겠어요. 영주의 위엄이라고 생각합니다.
Q.그럼 수비시 3~4번을 가리지않고 맡았겠네요.
그렇죠. 쉼없이 3~4번을 오가며 수비를 했습니다. 파워포워드를 맡을 때는 정말 악으로 깡으로 몸싸움을 하면서 입술을 깨물었고 스몰포워드를 막는 임무가 주어지면 골밑에서 외곽까지 부지런히 뛰어다니면서 슛기회를 주지않으려고 애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적어도 수비만 높고보면 저만한 멀티 자원도 많지 않았을겁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포워드가 아닌 (전)주원을 맡을 때도 있었으니까요.
Q.잉? 전주원은 포인트가드 아닌가요? 슈팅가드도 가능한 선수이기도 했고, 어쨌거나 가드잖아요.
말씀대로 주원이는 가드죠. 역대 포인트가드 탑을 다투는 선수이기도 하거니와 가드로서 신체조건도 좋은지라 슈팅가드로서도 좋은 효율을 뽑아낼 수 있는 올 어라운드 플레이어입니다. 어떤 이들은 여자 허재라고 부르기도 하던데 저도 상당 부분 동의합니다. 슛, 돌파 다 되고 시야, 패스도 나무랄데가 없었으니까요. 그런 주원이를 제가 막으려면 상당히 버거웠습니다. 일단 주원이는 가드잖아요. 아무리 사이즈가 엇비슷하고 저 역시 기동성을 갖추고 있다해도 가드와 포워드는 훈련받고 성장해온 과정 자체가 다른지라 스피드, 활동량, 움직이는 범위, 습성 등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어요. 4번 출신 3번인 제가 맡기에는 차별되는 부분이 너무 많았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감독님께서도 저를 믿고, 제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기에 주원이같은 특급 가드의 수비를 맡기셨겠죠.
Q.본래 빅맨 출신이 포지션 변경을 한 것만 해도 대단한데 가드까지 막을 정도면 수비는 정말 잘했을 듯 싶어요.
포지션을 떠나 고등학교 시절부터 수비는 자신있었어요. 더불어 코오롱에 들어온 이후 정주현 감독님께서 앞선 수비 쪽에서 활약할 수 있게 판을 깔아주셔서 일찍부터 수비는 포지션 상관없이 곧잘 할 수 있었던 듯 싶어요. 더불어 저희 팀에 천은숙 언니라고 있었잖아요. 주원이처럼 1번 역할은 물론 2번도 가능했던 전천후 가드였죠. 언니도 수비력이 매우 좋은 선수였는데 함께 뛰게되면 상대를 가리지않고 강하게 압박해서 밀어붙이는 수비가 가능했습니다. 끊임없이 따라다니면서 손질도하고 몸싸움도 붙고 그야말로 상대 입장에서는 찰거머리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겁니다.(웃음) 언니와 있으면 공격시에도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어요. 언니 자체도 매우 빠른 선수인데다 패싱센스까지 좋아서 속공의 파괴력이 한층 올라갑니다. 실제로 한번의 토너먼트에서 제가 득점상을 받은 적이 있거든요. 순전히 언니 덕분이었습니다. 패스를 워낙 잘주셔서 저는 잘 받아먹기만 하면 됐죠. 당시 언니로 인해 속공 상황에서 노마크 찬스가 정말 많이났어요. 앞선 수비하다가 상대 공격이 무산되거나 공을 빼앗아오면 바로 상대팀 골밑으로 냅다 뛰었는데 그 과정에서 언니가 받기쉽게 패스를 잘 넣어주었습니다.
Q.그나저나 전주원에 대한 수비는 잘 이뤄졌나요?
곧잘 막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보니 신문기사 등에서는 저와 주원이의 매치업을 ‘창과 방패’라고 표현하기도 했었죠. 물론 최고의 가드인 주원이를 락다운 시키듯이 완벽하게 막아냈다는 것은 아닙니다. 주원이가 어디 열심히 막는다고 호락호락 막힐 친구입니까. 은숙언니를 비롯해 김정민 등 저희팀에는 수비가 좋은 선수들이 꽤 있었습니다. 특히 센터를 맡고있던 정민이같은 경우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정말 알짜같은 선수였어요. 190cm정도되는 좋은 사이즈에 리바운드, 블록슛, 스틸 등에 모두 능했던지라 보이지않는 공헌도가 매우 높았죠. 당시 저는 정말 앞선에서 이를 악물고 주원이를 따라다니고 그랬는데 여기에는 뚫려도 뒷선수비가 다시 막아줄 것이다는 믿음도 작용했어요. 뒷선이고 앞선이고 따라다니면서 막아야되는 것은 맞지만 다른 보루가 있었던지라 앞선에서 힘을 아끼지 않고 쏟아낼 수 있었죠. 그게 동료간 신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팀이 더 손발이 잘맞고 강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Q.전주원부터 유영주까지 수비가 가능하다는 것은 팀 입장에서도 쓰임새가 정말 많았겠어요.
그렇죠. 기본적으로 1~4번 수비가 다 되고 무리하면 센터 수비까지도 어느 정도 가능했던지라 매치업적인 부분에서는 쓰임새를 가져가기 편한 스타일이었겠죠. 제가 다른 것은 몰라도 수비센스는 있었던 듯 싶어요. 완전히 그 선수들을 넘어서기는 힘들겠지만 주원이를 따라갈 발이 있었고 영주와도 어느 정도 몸싸움을 가져갈 정도는 됐어요. 그러다보니 온전히 제 포지션에 집중하기는 쉽지않았으나 그렇게라도 팀에 도움이 되었던 사실만으로도 만족했습니다. 선수 입장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중 하나는 ‘내가 이팀에 도움이 되고 있다’는 기분을 느낄 때거든요.
Q.수비적인 부분에서는 타고났었네요.
타고났다는 표현은 너무 거창하고요. 그냥 기동성, 힘 등을 고르게 갖추고 있다보니 적절히 잘 활용되었다고 보는게 맞을 듯 싶어요. 정상급 선수를 맞아서는 아무리 수비를 잘해도 한계가 있어요. 애시당초 완벽히 막아내기는 불가능한지라 평소 20득점하는 선수에게 14득점 정도까지만 허용해도 잘했다고 칭찬받을 수 있죠. 이른바 활약 지수를 줄여주는거죠. 그렇게만 되어도 그 선수가 만들지못한 득점에 더해 거기서 파생되는 다른 공격루트까지 묶이게 되면서 팀에게는 10득점 이상의 시너지가 발생하게 됩니다. 더욱이 수비는 타고난 것 이상으로 마인드적인 부분이 매우 중요해요. 근성으로 하는것이다는 말처럼 정말 매치업 상대와 자폭이라도 하겠다는 각오로 미친 듯이 따라다닐 수 있는 각오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영주같은 경우 제가 하도 귀찮게하니까 ‘언니, 제발 좀 옆으로 오지마세요’라면서 피곤하다는 표정을 짓더라고요. 그렇게만되도 수비는 어느 정도 성공한거죠. 특별히 기록상으로 차이가 없어도 상대팀 핵심 선수를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로하게만 만들어도 수비수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몫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주의 말에 저 역시 ‘내가 할소리거든. 너야말로 옆으로 좀 오지마’하면서 능글맞게 반응했던 기억이 납니다. 수비라는 것은 신체 능력만이 아닌 여러 가지가 필요한 부분같아요. 지금 생각해봐도 영주를 어떻게 막았나 싶어요. 힘과 탄력이 동시대 선수들중 탑급이었고 3점슛은 물론 원드리블 후 미들슛이 진짜 좋았거든요. 거기에 마음만 먹으면 밀고들어와 리바운드를 낚아채는 솜씨는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죠.
Q.수비 버전 올 어라운드 플레이어같은 느낌이에요.
하하핫…, 수비만 놓고보면 그럴 수도 있었겠네요. 제 의지든 팀의 지시든간에 매치업된 상대에게는 최대한 악착같이 달려들었으니까요. 그래서 대표팀 당시에도 감독님께서 상대 국가에서 중요한 선수를 대인마크하는 임무를 주시고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대표팀에 저를 자주 발탁해줬던 이유중 수비적인 부분이 크지 않았을까 싶어요. 아예 공격을 못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각팀 에이스가 모여있는 대표팀에서는 메리트가 높지않았거든요. 저역시 그런 것을 느끼고 수비에 더 집중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요.
“좋은 선생님들을 만났던 만큼 저역시 좋은 지도자가 되고 싶습니다”
Q.농구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농구는 삼천포에서 했지만 저는 본래 진주 출신이에요. 당시 형부가 교사로 있었는데 친구분께서 저를 가리키면서 ‘키도 크고 잘 뛰고 하니까 농구를 한번 시켜보면 어때?’라고 권유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운동은 좋아해서 별다른 거부감없이 시작하게 됐어요. 문제는 아버지께서 딸이 운동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는 것이었죠. 운동은 하고 싶고, 아버지와의 마찰도 원하지 않아서 몰래몰래 체육관에 가고 그랬어요. 처음에는 그냥 운동을 한다고 생각했지 농구에 대한 개념 자체도 없었어요. 그런데 하다보니까 너무 재미있는거에요. 마치 게임하듯 재미에 푹 빠져서 남아서 개인 운동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때가 초등학교 5학년때에요. 어린시절인지라 되도록 진주를 떠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저희 지역 중고등학교에서는 농구를 할 수 있는 곳이 없어서 삼천포로 가게 됐죠. 삼천포여종고 시절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신나요. 훈련 등은 힘들었지만 무슨 대회든 나가기만하면 성적이 나왔어요. 성정아 선배 시절부터 확실하게 존재감을 보였다고 하던데 저희 때도 그 강함이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밥먹듯이 결승전을 갔고 우승, 준우승도 많이했어요. 저 고3때는 4관왕도 했었고요.
Q.선수 생활하면서 부상 등은 어떠셨는지 궁금합니다.
코오롱에 와서 허리가 안좋아졌어요. 그래서 뛰는 것도 고등학교때만큼은 되지못했죠. 제 의지와 상관없이 스피드에서 손해를 보게됐습니다. 다리를 힘차게 차고 드는게 어려워지더라고요. 그리고 농구대잔치 막바지 시절 현대와의 경기에서는 새끼손가락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은적이 있는데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지더라고요. 부상을 치료하고 앞으로 생기게 될 프로에 뛰어들 것이냐 아님 본래부터 계획하고 있던 공부를 하느냐 고민한 끝에 후자를 선택하게 된거죠.
Q.당시 코오롱 분위기는 어땠나요? 다른 팀들 얘기를 들어보면 폭력, 폭언이 난무하던 곳도 꽤 있었더라고요.
지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죠. 많이들 고생했을겁니다. 다행히 저희같은 경우는 폭언, 폭력과는 거리가 먼 선수 생활을 했어요. 정주현 선생님께서는 선수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주셨어요. 지금와서 생각해도 정말 참 스승이셨죠. 물론 그런 것과는 별개로 운동은 많이 시키셨어요. 다른팀 사정을 모르니 어느 정도 수준이었는지는 몰라도 개인적으로 상당히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안준호 코치님도 함께 하셨는데 훈련에 관해서 만큼은 정말 호랑이같았습니다. 물론 안코치님 또한 선수들을 때리거나 함부로 하는 분은 아니셨어요. 선생님같은 경우 무척 꼼꼼하셨어요. 저희들에게도 농구일지 같은 것도 쓰게하셨는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런 경험들이 쌓여서 저에게 공부를 하고싶다는 생각을 더 강하게 만들었던 것 같아요.
Q.정말 좋은 분과 사제지간으로 인연을 쌓은 듯 싶어요.
그럼요. 코오롱이라는 팀을 가게된 것, 일찌감치 선생님과 인연을 맺게된 것 모두 저에게는 행운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농구를 잘하던 시절에도 아버지께서는 제가 공부를 하기를 바라셨어요. 저 역시 공부에 대한 갈증이 있던 상태에서 아버지 역시 너무 원하셨던지라 언젠가 공부를 해봐야지라고 마음먹고 있었죠. 선생님께서도 그런 입장을 이해하시고 선수로 5~6년 차 정도되어서 고참급이 되면 공부를 병행할 수 있게 도와준다고 약속했었죠. 더불어 선생님은 항상 제자들 밖에 모르시는 분이었어요. 외국 농구서적 등을 보기 힘들었던 시절 본인이 직접 해석해서 한글로 각주까지 달아서 저희들 보라고 주고 가시고는 하셨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존경을 하지않을 수가 없었죠. 저는 정말 지도자 복은 많았던 듯 싶어요. 코오롱 시절 정주현 감독님, 안준호 코치님 그리고 워싱턴 주립대 당시 감독님까지 너무너무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 인복이 좋은거죠. 아버지 또한 제가 다른 것 다 떠나서 교육적으로 저를 이끌어줄 선생님을 원하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정주현 감독님을 너무 좋아하셨고, 삼성의 조승연 감독님에게도 호감이 있으셨다고 들었어요. 그분 또한 점잖으시고 인품이 좋으셨어요.
Q.마지막으로 여전히 선수 하숙례를 기억하고 사랑해주시는 팬분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정말 죽어라 코트를 뛰어다니면서도 팬분들의 응원소리를 들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힘을 내던 시절이었습니다. 아마도 저뿐 아니라 그 시절을 뛰었던 많은 선후배들은 모두 그런 풍경을 잊지 못할 것같아요. 그만큼 저희에게는 너무나도 뜨겁게 행복한 추억이니까요. 농구가 좋아서 은퇴 후에도 일본, 미국 등지로 열심히 뛰어다녔습니다. 그곳에서 10년동안 많은 것을 배웠고 경험도 쌓았습니다. 아직 풀어놓지 않은 경험과 배움의 보따리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언젠가 기회가 주어진다면 싹 다 쏟아내고 싶은 마음 가득합니다. 팬 여러분들 항상 건강하시고 좋은일 가득하세요. 저 또한 언제나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하숙례가 되겠습니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본인제공
기사제공 점프볼
김종수 oete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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