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세 김영희, 따뜻한 가슴을 지닌 소녀같았다
기사입력 2023.02.02. 오후 03:37 최종수정 2023.02.02. 오후 03:37
대한민국 역대 최장신 여자 농구 선수로 명성을 떨쳤던 김영희(60‧205cm)씨가 지난달 31일 긴 투병 생활 끝에 향년 60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1984년 LA 올림픽 여자농구 은메달, 체육훈장 백마장, 맹호장 수상 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많은 국제대회에서 국위선양에 앞장섰던 인물로, 아쉽게도 1987년 11월 이른바 '거인병'으로 불리는 말단비대증 판정을 받고 한창 나이때 운동을 그만두고 말았다.
당시 한국농구는 아시아 라이벌 중국과 국제대회에서 만나면 매경기 엎치락뒤치락 했는데 대표팀을 가장 어렵게 했던 것은 진월방(207cm), 정하이샤(204cm) 등을 앞세운 높이였다. 우리도 박찬숙, 성정아 등의 출중한 빅맨자원이 있었으나 타고난 사이즈 차이는 극복하기 힘든 난제였다. 때문에 장신센터 김영희의 등장은 우리도 높이에서 해볼만한 카드가 생겼다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은바 있다.
하지만 한창 대표팀에서 뛸 때도 고인은 병을 가지고 있었고 본인은 물론 주변에서도 아무도 알지못했다. 여기에 대해 함께 대표팀에서 활약했던 농구인 S씨는 “당시에는 신체조건에 비해 기량 발전 등이 느리고 훈련 등도 잘 못따라오는 듯 해서 의아한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이후 알고보니 지속적으로 몸 상태가 안좋았다. 고통과 싸우며 힘겹게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진작 체계적인 몸관리와 치료에 들어갔다면 좀더 나은 결과로 바뀌지 않았을까 싶다”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치료시기를 놓쳐버린 고인의 병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만갔고 합병증으로 뇌종양 수술까지 받아 눈을 감기 전까지 긴 투병생활을 이어가야만 했다. 여기에 대해서 고인은 살아 생전 본지와 가진 <농구人터뷰(26) 김영희 편>을 통해 살아가면서 느꼈던 여러 가지 감정을 허심탄회하게 토로한 바 있다. 늦은 치료시기에 대해서는 늘 긍정적인 성격의 고인도 아쉬움이 많아보였다.
"그때는 몸이 좀 안좋아도 참고 뛰는게 당연시되던 시대입니다. 하지만 관절이나 그런 것도 아니고 몸 속에서 이상 신호가 오고 있었는데 그걸 왜 참으려고 한 것인지 지금 생각해도 후회스럽습니다. 1987년 24살의 나이로 쓰려져 병원에 갔더니 의사선생님이 왜 이제왔어! 하마터면 죽을 수도 있었다며 호통을 치셨던 기억이 나요. 그순간 비로소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전부터 증세는 있었지만 하루에 진통제만 15알 이상을 먹으며 하루하루를 버티어냈거든요“
당시 소속팀 감독의 현명하지 못한 대처도 고인의 병세를 악화시켰다. 고인은 LA올림픽이 끝나고 나서 농구대잔치를 뛰기위해 시즌 전에 소속팀에 복귀했는데 대표팀에 차출되기 전보다 몸이 한창 비대해져 있었다고 한다. 감독은 살을 빼라고 불같이 화를 냈고 이후 물 한모금 함부로 못먹게 했다. 거의 단식을 감행하며 운동을 했고 동료들이 자는 시간에도 사우나에 들어가 땀을 빼야만 했다. 사실상 고인은 살이 찐 것이 아니었고 신체 이상으로 인해 부은 상태였다고 보는게 맞다. 병원에 가서 심각하게 치료를 받아야 할 상황에서 역으로 몸을 혹사시켰던것이다.
병마로 쓰러진 뒤 고인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어버렸다. 낡은 주택의 5평 단칸방에서 살며 별세하는 순간까지 경제난에 시달렸다. 손님이라도 오면 앉을 곳이 없다는 이유로 침대를 버리고 쇼파 하나만 놓고 거기서 웅크리고 쪽잠을 잤다. 수시로 쓰러지고 나아지고를 반복했던지라 병원을 내집처럼 들락거렸고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처럼 긴잠을 자지 못한 채 2시간 간격으로 한번씩 깨어났다.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쉽게 피로해졌고 몸은 항상 부어있었으며 시력 악화 등 온몸이 멀쩡한데가 없을 정도로 종합병원이었다.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고인은 삶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치않았다.
”저희집에 자주 놀러오는 어르신들께서 영희는 늘 밝은 모습이라 보기좋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저라고 왜 힘이 들지않겠습니까. 나도 여자인데…, 키만 커지면 되지 다른 곳까지 커져서 외모도 이상해지고 자꾸 변해가는 모습에 3년동안 거울도 안본 적도 있습니다. 그나마 믿고 의지하던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5년 정도를 우울증으로 아무 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한겨울에 영하 17도인데도 현관문을 활짝 열어놓고 지내기도 하는 등 제 마음을 스스로가 통제를 못하겠더라고요. 울기도 정말 많이 울었죠“
‘선수 시절에도 늘 소녀같이 여린 심성에 다른 이들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였다’는 옛 동료들의 말처럼 고인은 그런 현실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보자’고 마음을 바꿔먹었다고 한다. 눈에 띄는 외모 때문에 자신을 어려워하는 동네 사람들에게 웃는 얼굴로 먼저 다가가고 다정하게 말을 걸자 주위에서도 편견을 버렸고 없는 살림이지만 음식 등을 나눠먹으면서 소박하지만 훈훈한 일상을 보내고자 노력했다. 고인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역시 끝도 없이 이어지는 병원비였다.
”돈이야 제가 경제 활동을 못하고 있으니까 없으면 없는데로 살지만 병원비에 대한 부담은 정말 힘들더라고요. 하나뿐인 남동생이 많이 신경을 써주고 있지만 그 녀석도 가정이 있는 사람인데 계속 짐을 줄 수가 없고…, 어떻게든 살기로 마음 먹은지라 사는데까지는 살다가고 싶은데 그러려면 병원을 다녀야 하니까요“
다행히 고인의 딱한 소식을 듣고 여러 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다가오기도 했다. 특히 농구계 선후배들 같은 경우 수시로 들락거리며 마음을 전했다. 하지만 희귀병을 앓고있던 고인의 치료비는 일반적인 병과는 액수 자체가 달랐던지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 걱정을 하지 않을 수 가 없었다. 눈에 띄는 것을 좋아하지않는 성격임에도 각종 인터뷰 등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렇게라도 하지않으면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잠에서 깨어나서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아…, 오늘도 살아있구나’였을 정도로 힘든 삶을 살았던 고인이지만 본래부터 인정이 많았던 성격 탓에 늘 ‘나도 남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삶에 대한 애착을 강하게 가졌던 배경에는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언젠가는 보답하고픈 마음도 컸다. 당시 인터뷰에도 세세하게 적혀있지만 시장통에서만난 허름한 복장의 어린 남매에게 반찬과 옷을 사주는 등 본인도 어려운 가운데 늘 주변과 함께하고자 했다. 오랜투병 끝에 힘든 삶을 살고간 고인이 하늘나라에서는 평온한 휴식을 취하기를 기원한다.
#글_김종수 칼럼니스트
#사진_WKBL 제공, 속보이는TV 人사이드 캡쳐
기사제공 점프볼
김종수 oete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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